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파비아누스 막시무스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파비아누스 막시무스(Marcus Servilius Fabianus Maximus)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 활동하였다. 그는 158년 중반 눈디니움 기간 퀸투스 얄리우스 바수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둔 보좌 집정관이었다.[1][2] 북아프리카 출신의 막시무스는 152년에 보좌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실라누스의 동생이자,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푸덴스의 친척,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처남이었다.[3] 생애그의 '쿠르수스 호노룸'은 로마에 있는 한 금석문으로 특히나 알려져 있다.[4] 기록으로 남은 그의 첫 직위는 '비긴티비리로 이뤄진 정무직 중 하나인 '콰투오르비리 비아룸 쿠란다룸'(quattuorviri viarum curandarum)이었다. 이 직위는 로마 원로원에 입성하는 데 있어 사전적이고 첫 번째 순서였다. 그 다음으로 게르마니아 수페르오르의 '본나'(오늘날 본)에 배치된 미네르비아 제1군단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를 수행하였다. 막시무스는 복무를 마친 뒤 로마로 돌아와 로마의 재무관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전통적인 공화정 시대의 정무관직을 마침으로써 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5] 이후로 그는 '악타 세나투스'의 기록관인 '아브 악티스 세나투스'를 맡았다'. 그 다음으로 그는 귀족 조영관 및 법무관 등 전통적 공화정 시대의 정무관직을 두 번 더 수행했다. 법무관직을 관둔 뒤, 막시무스는 혹은 아시아 속주의 총독인 프로콘술의 대리격인 '레가투스' 로 선출되었다. 얼푈지 게저는 이 시기를 146년경으로 추측하였다. 이후로 몇 가지 요직들을 거쳤다. 처음은 발레리아 가도의 감독관이었는데 얼푈지는 이 감독관 직을 147년과 150년 사이에 임명되었을 겄으로 보았다.[6] 그 뒤로 막시무스는 시리아 속주에 배치된 갈리카 제3군단의 '레가투스 레기오니스' 혹은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얼푈지는 군단장 직위를 150년부터 153년까지이었을 것으로 본다.[7] 로마로 돌아온 뒤, 그는 얼푈지가 153년과 156년 사이로 추측하는 '프라이펙투스 아이라룸 사투르니누스'에 임명되었다.[8] 그런 다음 고위 자리에 올랐다. 막시무스의 고위직은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신전들을 감독하는 직책인 '쿠라토르 아이디움 사크라룸'(curator aedium sacrarum)으로, 얼푈지는 160년쯤으로 추측하였다.[9] 다음 직위는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얼푈지는 161년에서 162년 사이로 보았다.[10] 그 해 말에 마르쿠스 얄리우스 바수스가 파르티아 전쟁 기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핵심 조언자 집단의 일원인 '코메스'가 되었고, 막시무스는 그를 대신하여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임명된 것이었는데 얼푈지에 따르면 그의 총독 기간은 166년까지였다고 한다.[11] 막시무스가 두 번째 총독직을 마친 뒤 공백으로 남아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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