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대학 부속 오호리 고등학교에서는 입학 때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력적인 구위를 자랑하여[1] 3학년 때 여름에는 1981년의 에이스로서 하계 고시엔 대회(제6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첫 경기이자 2차전 상대인 하코다테 대학 부속 유토 고등학교를 5피안타 2실점으로 막아내고 완투 승리를 거두었으나[2] 3차전에서 진제이 고등학교에게 패했다. 와세다 대학을 진학 목표로 2년 간의 재수 끝에 기타큐슈 대학에 진학했다.[3]
2학년 가을이던 1985년에는 에이스로서 규슈 6대학 리그에서 팀을 3위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으나[4] 고교 시절부터 주목하고 있었던 세이부 라이온스의 구단 관리부장 네모토 리쿠오가 접촉하여 입단 제의를 받고[1] 그 해에 대학을 중퇴했다. 이듬해 야구부가 없는 ONO 푸드에 입사하여 레스토랑의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것 등을 맡으며[5][1] 1986년 11월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선 거의 ‘노 마크’된 상태에서 세이부로부터 단독 1순위로 지명을 받았다. 담당 스카우트는 구스키 도루였으며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5,000만 엔, 480만 엔(모두 추정치)으로 계약을 맺었다.[6]
프로 야구 선수 시절
타자로서의 소질에도 정평이 나있었지만[7] 결국엔 투수가 되면서 프로 1년째인 1987년 자체 개인 훈련의 단계에서 뛰어난 신체 능력을 발휘해 모리 마사아키 감독에게서 높은 밸런스의 능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3] 9월 10일에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1군에서의 등판을 이뤘고 10월 13일에는 프로 데뷔 첫 선발로 등판하여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의 구원으로 등판해 1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8]
프로 2년째인 이듬해 1988년에는 히가시오 오사무의 출장 정지와 오노 가즈유키의 이적도 있어[9]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팜볼을 무기로 전반기에만 8승을 올리는 등 선발진의 일각으로 활약했다.[10] 후반기에는 팜볼의 제구가 되지 않아 슬럼프를 겪었지만 시즌에서 10승을 기록했고 같은 해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선 최소 피안타의 시리즈 타이 기록이 되는 2피안타 완봉 승리[10]를 거두어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을 평가받아 신인왕을 차지했고 오프 시즌에는 1,000만 엔이 상승한 연봉 1,500만 엔(추정치)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1]
그러나 1989년에는 팔꿈치와 어깨 통증으로 2경기에 등판에만 그쳤고 이듬해 1990년에는 시범 경기에서 호투하여 선발 복귀를 목표로 두었지만[12]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1991년경부터 ‘연투파’로의 전향을 목표로[13] 1993년 시즌 개막 직전인 3월 24일에 시미즈 요시유키와의 맞트레이드로 나카무라 히데오와 함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이적했다. 요코하마에서는 중간 계투나 로테이션의 선발을 맡아 6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5년 만에 선발 승리를 거뒀다.[13] 그 후 1995년 시즌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 후
1996년에는 요코하마 1군 투수 코치 보좌로 발탁됐고 이듬해 1997년에는 2군 투수 코치 보좌로 전환되면서 그 해를 마지막으로 퇴단했다. 요코하마 퇴단 후에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세이부로 복귀해 1998년부터 1999년, 2001년부터 2002년, 2004년부터 2005년까지 2군 투수 코치 겸 트레이닝 코치, 2000년에는 2군 투수 코치, 2003년과 2006년부터 2007년에 걸쳐서 1군 투수 코치(불펜 담당) 겸 트레이닝 코치를 맡았다. 2007년에는 팀 평균 자책점이 5위에 그칠 정도의 침체를 겪는 등 26년 만에 B클래스로 마감하여 그해 10월 7일에 구단측으로부터 다음 시즌의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14] 2007년에 코치 계약이 끝나면서 타 구단으로의 이적도 백지화돼있던 차에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의 후쿠오카 레드 와블러스로부터 감독 취임 요청을 받고 이것을 수락했다.[15] 현지에서의 인망이 두텁고, 또한 프로에서의 실적이 있는 점을 평가받았다고 한다.[15] 프로에 들어가는 선수가 탄생하는 것을 목표로[15]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감독을 맡았고 구단이 리그전 참가를 포기한 것과 동시에 팀을 퇴단했다.
2010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군 투수 코치(불펜 담당)로 발탁됐고(2015년에만 2군 투수 코치) 2018년 6월 16일,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의 사임에 의해 불펜 담당에서 벤치 담당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2019년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에 의해서 라쿠텐을 퇴단했다.[16]
2019년 11월 4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투수 코치로 발탁됐고 등번호는 92번으로 정했다.
플레이 스타일
최고 속도 143 km/h의 속구와 팜볼에 더해 커브나 슬라이더를 구사했다.[17] 또한 제구가 좋을 뿐만 아니라 강속구가 낮은 쪽으로 잘 들어가고[18] 마운드에서의 배짱이 좋은 것도 정평이 나있다.[17]
에피소드
프로 선수 시절에는 신인왕을 차지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지만 부상 등의 어려움도 경험하고, 고압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후배에게 호감을 얻는 성격이었다고 한다.[15]
1988년 시범 경기에서 주니치를 상대로 호투했을 때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경기 종료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어째서 저런 알 수 없는 투수에게서 당하는 건가”라고 말했다. 이 일이 그 해 열린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의 완봉으로 이어졌고 경기 중 벤치로 돌아올 때마다 주니치의 벤치를 노려보았다고 한다.[19] 또한 2011년에는 1군 투수 코치를 역임하는 라쿠텐의 감독으로 호시노가 취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