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스계 오스트레일리아인(웨일스어: Awstraliaid Cymreig)은 웨일스에 기원을 둔 조상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아의 공민이다.
인구통계
2011년 인구조사 기준, 통계 지역별로 분류된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대비 웨일스 혈통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25,317명의 오스트레일리아 거주민이 웨일스에서 태어났으며,[1] 113,242명(0.44%)은 단독으로 또는 다른 혈통과 함께 웨일스 혈통을 주장했다.[2]
존스라는 성은 웨일스에서 흔하지만, 이 성이 중세 시대에 잉글랜드에서 처음 유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흔한 성 중 하나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1% 이상을 차지하여 자가 식별보다 더 높은 웨일스 혈통 비율을 시사한다.
1996년 연구에 따르면 웨일스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총 민족적 수는 243,400명이다. 이 중 혼혈이 아닌 순수 혈통은 44,100명이고 혼혈은 683,700명이다.[3] 이는 웨일스인이 잉글랜드인,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및 콘월인 다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앵글로-켈트족 집단임을 의미한다.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웨일스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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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제임스 쿡은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이 사우스 웨일스 (특히 그가 알고 있던 베일오브글러모건 해안)를 떠올리게 했다고 믿어, 그곳에 "뉴사우스웨일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는 1788년 제1함대와 함께 시작된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있었다. 웨일스인들은 이 초기 정착민들 중 일부였으며, 많은 범죄 행위에 대해 시행된 유배 정책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식민지로 이주해 왔다.
웨일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의 대규모 이민은 19세기에 뉴사우스웨일스주와 빅토리아주가 인기 있는 목적지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웨일스 정착민들은 대부분 농부였으며, 이후 금광꾼과 광부들이 뒤를 이었다.
골드 러시는 1850년대 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되었고, 1854년 유레카 봉기는 민족주의적 정서의 초기 표현이었다. 그 지도자 중에는 웨일스 태생의 차티스트존 배슨 험프리가 있었는데, 그는 이 시기에 웨일스에서 이주해 온 중요한 이민자 집단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