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른 오스트레일리아 전체 인구에서 잉글랜드 조상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2011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른 이너 시드니 전체 인구에서 잉글랜드계 응답자들의 비율.
잉글랜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앵글로-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도 알려져 있으며,[1] 조상이 전부 또는 일부가 잉글랜드에서 유래한 오스트레일리아인을 말한다. 2021년 인구조사에서 8,385,928명, 즉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33%가 잉글랜드 혈통(단독 또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2]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큰 자칭 조상 집단이다.[2] 1788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설립 이래로 잉글랜드 민족 출신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가장 큰 집단이다.[3]
잉글랜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앵글로켈트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하위 집단이며, 앵글로켈트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유럽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의 하위 집단이다. 앵글로켈트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의 다른 하위 집단(즉, 조상이 브리튼 제도에서 유래한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는 아일랜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스코틀랜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및 웨일스계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있다. 이들 조상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오랜 역사와 수세기 동안 발생한 높은 혼혈도로 인해 총체적으로 지칭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잉글랜드 또는 기타 앵글로켈트계 조상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조상을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식별하는 경향이 있다.[4]
뉴사우스웨일스주는 1788년 영국 정부에 의해 죄수 식민지로 설립되었다.[6] 방문자들은 1788년 이후 최소 50년 동안 시드니의 잉글랜드적 특성을 묘사하며 죄수 막사를 내려다보는 교회들의 전통적인 잉글랜드식 모습을 언급했다. 1세대 식민지 시드니 주민들은 주로 잉글랜드인이었다. 1788년과 1850년 사이에 160,000명의 죄수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왔다.[7] 1788년과 1840년 사이에 80,000명의 잉글랜드 죄수가 뉴사우스웨일스주로 이송되었으며, 1825년과 1835년 사이에 가장 많은 수가 왔다. 1846년 뉴사우스웨일스주 인구조사에서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이 57,349명,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이 47,547명,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이 14,406명으로 집계되었다.[8] 1859년까지 이민 온 자유 정착민 220만 명(73%)은 영국 출신이었다.[9]
1850년대 골드 러시로 인해 더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빅토리아주로 이주했다. 1854년까지 빅토리아주에는 97,943명의 잉글랜드 태생 인구가 있었다. 이민 정책과 지원 제도는 잉글랜드로부터의 높은 이민 수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6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도착한 100만 명의 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잉글랜드 출신이었다.[10]
1840년에서 1870년 사이에는 잉글랜드인보다 아일랜드계 보조 이민자가 더 많았으나, 1870년대에 잉글랜드인이 더 많아지면서 이러한 추세가 바뀌었다.[8]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외 출생자 중 최소 75%는 브리튼 제도 출신이었다. 잉글랜드 또는 웨일스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비율은 1861년부터 1911년까지 (약 47%로) 상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비율도 (약 12%로) 마찬가지였다.[11]
잉글랜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연방 수립(1901년) 당시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했다.[25] 1922년부터는 대영 제국 정착법에 따라 수천 명의 잉글랜드 이민자들이 지원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시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거의 무제한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이민부 장관 아서 캘웰은 새로 오는 이민자 10명 중 9명이 영국 태생이기를 원했다.[10] 잉글랜드 태생 이민자들은 1982년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대부분 지원금을 받았다.
1910년대, 1920년대, 1950년대, 1960년대의 잉글랜드 이민자 급증은 20세기 내내 잉글랜드 출생자가 가장 큰 단일 이민자 집단으로 유지되도록 했다.[8] 1978년에는 주로 잉글랜드 조상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전체 인구의 45% 이상을 차지했다.[26] 잉글랜드 조상은 1986년에 660만 명(46%), 2001년에 640만 명(37%)으로 보고되었다.[27] 잉글랜드 태생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잘 대표되고 있지만, 1980년대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잉글랜드 이민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면서 잉글랜드 태생자가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사회는 강력한 잉글랜드 유산의 영향을 계속 받고 있다.[3]
인구 통계
2021년 인구조사에서 8,385,928명, 즉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33%가 잉글랜드 조상(전체 또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28]
잉글랜드계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단일 민족 집단 중 가장 영향력이 컸다.[34] 잉글랜드인에 의한 오스트레일리아 건국은 지명, 오스트레일리아의 영미법계 법률 시스템, 피시 앤드 칩스 및 선데이 로스트와 같은 인기 있는 요리,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어인 영어에서 여전히 분명히 드러난다.
↑Adair, Daryl (1998). 〈Conformity, Diversity, and Difference in Antipodean Physical Culture: The Indelible Influence of Immigration, Ethnicity, and Race during the Formative Years of Organized Sport in Australia, c. 1788–1918〉. Cronin, Mike; Mayall, David. 《Sporting Nationalisms: Identity, Ethnicity, Immigration and Assimilation》. Routledge. 22쪽. ISBN9780714644493.
↑D. Richards 'Transported to New South Wales: medical convicts 1788–1850' British Medical Journal Vol 295, 19–26 December 1987, p. 1609
Haines, Robin F. Emigration and the labouring poor: Australian recruitment in Britain and Ireland, 1831–60 (Springer, 1997).
Richards, Eric. Britannia's children: emigration from England, Scotland, Wales and Ireland since 1600 (A&C Black, 2004) online.
Richards, Eric. "How did poor people emigrate from the British Isles to Australia in the nineteenth century?" Journal of British Studies 32.3 (1993): 250-279. online
외부 링크
James Jupp -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2008). “English”. 《시드니 사전》. 2015년 10월 4일에 확인함. (시드니의 잉글랜드인) [CC-By-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