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 베클리![]() 제이크 베클리(Jake Beckley) 또는 제이콥 피터 베클리(Jacob Peter Beckley, 1867년 8월 4일 – 1918년 6월 25일)는 "이글 아이"(Eagle Eye)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야구 1루수였다. 그는 1888년부터 1907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피츠버그 앨러게니스, 피츠버그 버거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뉴욕 자이언츠, 신시내티 레즈 및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뛰었다. 베클리는 13시즌 동안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의 244개의 3루타는 역대 4위이며[1] 23,767개의 풋아웃은 메이저 리그 기록이다. 통산 타율 .308을 기록한 그는 1971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어린 시절베클리는 미주리주 해니벌에서 태어났다.[3] 그는 번하트와 로시나(네스) 베클리의 아들이었다. 베클리는 십대 시절부터 세미프로 야구를 시작했다. 해니벌의 전 팀 동료인 밥 하트는 18세의 베클리를 웨스턴 어소시에이션 소속 레번워스 오일러스에 추천했다.[2] 레번워스와 링컨 팀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베클리의 계약은 웨스턴 어소시에이션의 세인트루이스 화이츠에 판매되었고, 이후 1888 시즌 중반에 해리 스탤리와 함께 피츠버그 앨러게니스에 4,500달러에 인수되었다.[4] 메이저 리그 경력앨러게니스에서 한 시즌 반을 뛴 후, 베클리와 그의 동료 여덟 명은 새로 창설된 플레이어스 리그 (PL)의 팀인 피츠버그 버거스로 이적했다.[4] 감독인 네드 핸런도 함께 넘어갔다. 베클리는 "어차피 이 경기는 돈 때문에 하는 것"이라며 PL로 갈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2] 이 리그는 한 시즌만 지속되었고, 베클리는 다음 다섯 시즌 반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보냈다.[4] ![]() 1896년 7월 25일, 베클리는 뉴욕 자이언츠로 해리 데이비스와 1,000달러에 트레이드되었다.[4] 베클리는 다음 시즌인 5월 22일 자이언츠에서 방출되었고, 5일 후 신시내티 레즈와 자유 계약을 맺었다.[4] 레즈에서의 첫 시즌, 베클리는 신인 호너스 와그너를 상대로 숨겨진 공 트릭을 사용하여 잡는 데 실패했는데, 이는 그가 상대방에게 자주 사용하던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후 와그너의 루이빌 커늘스가 신시내티에서 경기를 할 때, 베클리는 두 개의 야구공을 사용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와그너를 잡는 데 성공했다.[5]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1900년 이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베클리는 1897년 9월 26일 같은 경기에서 세 개의 홈런을 날렸는데, 이 기록은 1922년 켄 윌리엄스에 의해 다시 달성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따라잡지 못했다.[2] 그는 신시내티에서 7시즌을 뛰었고, 이후 1904년 2월 11일 카디널스에 의해 인수되었다.[4] 베클리는 1907시즌 이후 통산 2,930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캡 앤슨에 이어 2위로 은퇴했다.[6] 그는 메이저 리그 통산 3루타 244개로 여전히 역대 4위에 랭크되어 있다. 2014년 시즌 기준으로 베클리는 파이리츠 1루수 중 역대 최고 타율(.300)을 기록하고 있다.[7] 베클리는 통산 풋아웃 23,743개로 MLB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8] 1루수로서 2,376경기를 출전하여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다.[8] 말년![]() MLB 경력이 끝난 후, 베클리는 1908-1909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캔자스시티, 1910년 웨스턴 어소시에이션의 배틀스빌, 1911년 센트럴 어소시에이션의 해니벌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3년 페더럴 리그에서 심판으로 일했으며, 미주리주 리버티에 있는 윌리엄 주얼 칼리지에서 야구 코치로도 활동했다. 프로 생활 은퇴 후 심판 및 코치 외에도 베클리는 캔자스시티에서 곡물 사업을 운영했다. 베클리는 1891년 해니벌의 몰리 머피와 결혼했지만,[2] 그녀는 결혼 7개월 만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선수 생활이 끝난 후 재혼했다.[9] 베클리는 50세의 나이로 캔자스시티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10][3] 그는 해니벌의 리버사이드 묘지에 안장되었다.[3] 영예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