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한사군
중립적 시각 문제지도와 문장에서 기존 학계에 대해 감정적 서술이 난무합니다. 감정과 이성은 구분해야 합니다. 여기 적혀 있는 내용도 아직 논란이 많은 내용이며 확실하게 입증된 내용이 아닙니다. 자기 개인홈페이지가 아닌 이상 저런 식의 표현은 안됩니다.--WaffenSS 2006년 5월 24일 (수) 09:17 (KST)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것은여러 사서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어쩌고 하는데 그전에역사공부부터 하세요 모르면 그냥 닥치고 있는게 좋을듯합니다. 잘못된 지식은온국민이 습득하게 할수는없습니다. 년 5월 24일 (수) 08:10 (KST)
본문 내용 모순 관련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토착세력'이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을 축출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요. 이는 모순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유지하려면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6년 9월 24일 (일) 12:14 (KST) 동음이의어 외부고리'생성 및 소멸, 의의'항목 세째 문단에 '예'는 '예(濊)'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218.237.242.39 2006년 10월 14일 (토) 13:18 (KST)
한사군에 대한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의 시각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된 한국사의 방향도 그러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의 문답란에는 이런 답변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요약하였습니다. 원문은 http://kuksa.nhcc.go.kr/front/addservice/addFrameSet.jsp?pUrl=/front/addservice/qna/listQnaBoard.jsp 에서 '한사군'으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과거의 학설보다는 현재 사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더욱 일반적일 듯합니다. 본문 내용의 주 설명와 부연설명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24일 (일) 10:53 (KST) 소주제 문헌 부분의 내용해당 부분의 내용은 소주제 자체가 관련된 '문헌'을 소개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방향에 편중되어 서술되어 있습니다. 문헌에 대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문헌의 내용에 대하여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그 평가가 특정한 방향에 편중되어 있는 점은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한 문헌 내용 기술로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Xakyntos (토론) 2008년 6월 19일 (목) 17:04 (KST) 불필요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한사군의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설치 항목의 경우 한사군의 설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위만조선의 역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전한 사이에 벌어진 전쟁 역시 한사군의 설치와 관련되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역사서나 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주제 자체와 관련이 적은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오히려 객관성이나 가독성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전한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만 간략하게 서술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을 구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월 2일 (금) 18:07 (KST)
--Tol6560 (토론) 2019년 3월 14일 (목) 05:34 (KST) 한사군 낙랑 위치 위키 표현을 보면 중국 낙양으로부터 5,000리=1,963Km 구글 어스로 거리 측정해보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보다 위쪽이고, 한사군 지도 표현된 위치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은,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을 부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위키와 사기 번역문 성씨 문중 상계 연표 유전자 분포 여러 내용을 보면서, 느낀 것은 기자 조선은 실존했던 단군 조선을 뿌리로 한 혈통입니다. 단군조선 영역은 북방 유목 부족들로, 북경 북쪽과 동쪽을 싸고있는 산맥이 중국 만리장성 중원을 형성하고 있는, 외곽 지역 부족들로, 일부가 남하 황하 하나라를 치고 중국을 통치했습니다. 상나라 출발 지역은 여러 유물을 고려하면 랴오닝성 요하 지역으로, 단군조선 환인(위키 관련 검색 결과를 종합하면, 지도자를 표현하는 문자 '환(桓)은 밝은 빛으로 그 모양을 본떴다' 지명에 남은 것입니다)현, 졸본 부여 오녀산성도 선양시 외곽지역 200Km 거리입니다.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났다는 인因, 어질 인仁은 지도자를 표현하는 같은 뜻입니다. (桓 한자 윈도우 한자 검색 푯말 환 표시, 본 뜻 아님) 단군조선朝鮮 혈통 상商나라가 중원을 주周족 주周나라에 뺏기면서, 북경 연나라 옆 요하지역=평양=양평=(평평 할 평平 부드러운 흙 양壤, 넓고 평평한 농사짓기 좋은 땅), 요하 일대를 수도로 조선을 자子 성姓을 쓰는 상商왕족 기箕자子(자子성姓기箕씨氏) 서여가 이엇고, 천년이 넘게 국가를 형성하면서, 기자箕子조선朝鮮 영역은 한반도 북쪽과 동북 3성 지역에 존재했습니다. 스키타이족(동호족=선비족)은 BC 600년 경부터 기마 민족으로서 중앙아시아와 동부 유럽에서 건너와서, 지금의 중앙아시아지역과 유럽스탭(steppe)지역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연방의 영토에 있는 지역을 걸져서 고대에 국가를 건설했고, 기자조선~고구려까지 교류와 전쟁을 했고, 랴오닝성 지역에 영향을 줬고, 선비 흉노 혈통은 경상도 지역에 많은 분포하고 있습니다. BC500년 지도에서 연나라는 갈석산 지역까지 표시됐고, 요하지역은 중원 통제 밖에 있었던 기자조선 영역입니다. BC300년, 연나라 장군 진개(유목민에 인질 경험)에 연나라 북경으로부터 서쪽 2천리를 뺐겼을 때, 요하 북서쪽 벌판엔 유목민 동호족까지 정벌했고, 2천리는 랴오닝성 전체와 남쪽으론 평안북도 박천강 위쪽을 경계로 했다는 것을 보면, 기자 조선은 이때 요하 평양에서 현재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BC500년경 지도엔 없던 이 지역 표기가, BC206년~202년 항우가 세운 서초 18국과 별도로 요하지역과 박천강 유역까지 요동으로 표시됩니다. 연나라 진개 공격에 기자조선은 서쪽 지역은 잃었지만, 수도를 현재 평양으로 옮기고 남은 지역을 다스리다가, 연나라 주족 주문왕 아들 위卫=衛강康숙 봉封 후손인 희姬성 위衛씨 위만 1000여명 공격에 기자조선이 망했을 땐 현재 평양 성이 점령 당한 것으로, 기자 조선이 망하면서 사회 지도층인 왕족과 대신들은 해로를 따라 남하 청주에서 마한을 세웠지만, 기존 백성들이 모두 남하한 것은 아닌, 위만 조선이 평양을 차지했을 BC194년 즈음, 동북쪽엔 기자조선=상(은)나라 달력을 쓰는 부여가 생성됐습니다. 낙랑 지역은 연나라 진개 BC300년~낙랑 AD37년 고구려에 수복될 때까지 337년, 랴오닝성 지역은 전연에 뺏길 때까지 619년 정도 주족 계통 왕족이나 주족 영향을 받는 토착 호족이 일시 점령했던 것이고, 랴오닝성 지역은 북쪽 유목 부족인 선비족 전연이 AD 319년 점령했고, AD 407년 후연이 고구려에 망할 때 만리장성 갈석산까지 조선朝鮮민족이 완전 수복 했습니다. 따라서 랴오닝성 요하 지역이 중국 영향을 받은 것은 619년, 원래 우리 단군 조선과 상나라가 시작된 지역 역사에서 짧은 기간입니다. 한반도와 동북 3성 지역은 4,352년 동안 조선朝鮮민족이 가장 오랫동안 점유했던 지역으로, 중국은 조선朝鮮민족을 이은 우리 남북한 조선朝鮮민족에게 동북3성 평화적 이양 해야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쓰고 있던 단기 4,352년 역법까지 남아있는 판국에, 단군 조선을 소설로 치부하는 것은, 여러 유물 발견, 유전자 지역 분포, 갑골문자부터 시작된 성씨 혈통과 연관 있는 나라와 지역 이름, 언어, 부정하는 것은 논센스로 생각됩니다. 명칭 따위가 무엇이든 한4군현을 수복한 것은, 고구려, 고구려는 주족 위만 조선 후예가 아닌, 조선=상=기자조선 계통인 3부여-고구려 조선족에 의해서 수복 된 것입니다. 위만조선= 기자조선을 전부 점령하지 못한 수도만 점령한 일제치하와 동일한 개념, 한국사에서 삭제해야 하고, 조선의 일부가 세운 상나라 혈통인 기자 조선이 위만에 망한 것은 사회지도층 일부로, 대다수 혈통은 부여=고구려 생성과 함께 기자조선에서 이어졌습니다. 위만조선은 주족 중국의 역사로 한국사가 아닙니다. 발해 신라 남북국 시대처럼, 단군조선-상나라-기자조선-마한韓 부여-삼국시대로 한국사는 재정립 돼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소설이 아닌, 위키에서 검색되는 고대사, 사기, 왕족 중심으로 번성할 수 밖에 없는 주요 유전자 분포도, 홍산문화 요하문명 지역, 5천년 동안 아시아 지역은 주周족 주周나라 후손과 조선朝鮮족 상商나라 후손 사회 지도층 패권 경쟁이 본질입니다. 모든 관점을 국가주의에 맞춰서 분류하려니까, 실제 증거가 있는 문중 혈통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검증 할 수 있슴에도 하지 않으면서 무시합니다. 아시아 역사는 국가의 역사 보단 갑골문자=한자, 상형문자 발생과 함께 시작된, 지역 혈血족族을 표시하는 성姓씨氏 혈통 가문의 역사가 더 오래 됐고, 아시아 가문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오면, 섞여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혈통이 한중일입니다. 왕족 혈통 중심 역사인 봉건 국가들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하니까, 국가주의 주관이 개입되고, 같은 사실에 대해서 다른 해석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 역사적 증거 '사실'들에서 옛날 봉건 왕조 누가 이 지역을 다스렸느냐는 대결 구도만 형성하는 것으로, 역사는 그런 것을 위해서 정리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X와 Y 로 구성돼있고, 사람의 역사는 남자 부계혈통 Y왕족 역사는 반쪽 짜리 역사로, X 혈통 역사를 유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국가와 가문의 경계는 사라집니다. 남자의 역사가 아닌, 사람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고, 그것엔 개인, 봉건 요소 강한 국가 주관이 개입되면, 아무리 많은 유물 출토 해도, 주관적 해석 왜곡이 발생 소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사군은 요하지역에 있던 현실적 '사실'이고, 유물 출토 역시 처음부터 다시 해석 역사를 정리해야 합니다. 금석병용기 관련브리태니커백과의 내용을 참조하면, 금석병용기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꽤 오래 전의 것인 듯합니다. 《글로벌세계대백과》에서 인용된 내용인 듯한데, 맞게 고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1월 7일 (수) 15:50 (KST) 이건 아닌데요.....이 내용과 지도는 한국사신론이라는 식민사관에 물들어진 책에 너무 입각해있네요. 식민사학의 잔재를 재빨리 제거합시다! xakyntos씨는 여기에 태클걸지 마십시오. World historia (토론) 2012년 7월 12일 (목) 19:43 (KST)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한사군의 위치에 관해서 많이 편집하였습니다. 다시 원래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저를 포함한 위키 편집자들과의 토론을 거쳐 어느 정도 동의가 되었다 싶을때 문서를 수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22.101.9.93 (토론) 2012년 9월 20일 (목) 19:47 (KST)
한사군 --> 한군현이 문서의 제목을 기존 한사군에서 새로 한군현으로 변경합니다. 표제어 변경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한사군'(漢四郡) 대신 '한군현'(漢郡縣)으로 용어를 변경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2일 (일) 16:36 (KST)
부정확한 명칭위에서 Xakyntos 님이 잘 지적하신대로 한사군이나 한군현이나 모두 부정확한 명칭인 것은 맞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나라는 서기 220년에 망했지만, 낙랑군은 서기 313년까지 지속되었고, 대방군은 314년에 고구려에게 멸망될 때까지 존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기 220년 한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거의 100년 정도 더 오래 존재했던 낙랑군이나 대방군에 대해서 한사군 또는 한군현이라고 부르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멸망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의 지방 군현이라는 게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대체로 학계에서도 낙랑군 등에 대하여 중국 본토의 한나라와는 상당히 독립성을 가진 별도의 정치체제로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낙랑의 지배층은 한족이었으나 대다수를 이루는 피지배층은 고조선 사람이었고, 낙랑군의 문화 역시 중국 본토의 한나라 문화와 토착 고조선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별개의 문화를 유지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어쩌면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비슷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몽골의 후계를 자처한 사람들이 건국한 인도의 무굴제국과 비슷했을 수도 있겠죠.) 이런 점에서 낙랑군, 대방군 등을 단순히 한사군 또는 한군현이라고만 부를 경우, 한나라의 다른 여러 지방 군현들과 비슷한 지방 정치체제로 잘못 판단할 수 있으므로, 사실은 둘 다 부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5일 (수) 04:18 (KST) 유서 깊은 명칭 ?위에서 Xakyntos님의 글 중에서 "전근대 시대부터 쭉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동이' 논쟁 기억하시죠? 전근대 시대부터 수천년간 상나라에 대해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서술해 왔으나, 지금은 어떤가요? 현대 사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전근대에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이 사실상 무의미해지지 않았나요?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수년전 Xakyntos 님이 저에게 가르쳐준 내용입니다. 지금도 그 때의 가르침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제 와서 스승(?)이 그 가르침을 어기고, 전근대부터 쭉 이어져온 유서 깊은 명칭(즉, 한사군)을 선호한다고 하시면, 학생(!)이 머리가 혼란스러워집니다. ^_^ 전근대의 자료와 출처를 아무리 많이 제시하더라도 현대의 최신 연구성과에 의해 깡그리 부정될 수 있다고 저에게 가르친 사람이 바로 Xakyntos 님이었으니까요. 따라서 한사군으로 명칭을 되돌려야 하는 다른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5일 (수) 04:26 (KST)
위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한사군을 한군현으로 변경한 이유는 저만의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 한군현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용자:Jtm71 님의 의견을 읽고 공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Jtm71: 님을 이 토론에 초청하여, 의견을 들어본 후에 결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3월 27일 (금) 22:20 (KST)
아직까지 Jtm71 님이 의견이 없으시네요. 제가 방금 사토:Jtm71에 의견을 남기고, 이 토론이 있다고 알려드렸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5년 4월 1일 (수) 04:52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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