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북송리 북천수
포항 북송리 북천수(浦項 北松里 北川藪)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북송리에 있는 북천변을 따라 띠처럼 길게 조성된 소나무와 곰솔 숲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숲 중 3번째로 긴 숲으로 알려져 있다.[2] 2006년 3월 28일에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b] 조선 후기 흥해 군수 이득강이 수해방지와 바람막이 역할을 비롯해 풍수상 도음산의 맥을 보호하여 흥해읍의 풍수형국을 완성하기 위하여 군민들을 동원해 인위적으로 조성했으며, 지홍관 군수 때에 이르러 숲이 확대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흥해군지도〉에도 북천수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의 임수》에는 1938년 조선총독부 조사 기록이, 1979년에 출간된 《한국지명총람》에는 북천수 조성 유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탈과 훼손을 겪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상당수의 나무들은 광복 직후 심어졌다. 정월보름날에는 수림지의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마을 앞산에서 산제를 지내며, 전년도에 묻어둔 간수 병에 담긴 간수의 상태를 보고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습이 있는 등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왔다. 또한 최근에는 맨발 걷기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명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북송리에 있는 북천수(北川藪)는 북천(北川)을 따라 심어진 소나무 숲이라는 뜻인데,[5] 이 이름은 1872년에 제작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흥해군지도〉(興海郡地圖)에도 나타나 있으며,[6]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의 임수》(朝鮮の林藪)에도 언급되고 있다.[7] 북천(현재의 곡강천)은 신광면 마북리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강의 이름이며, 반대로 도음산에서 시작해 흥해읍의 남쪽을 흐르던 강을 남천(南川, 현재의 초곡천)이라 불렀고, 남북의 두 하천이 서원산 앞 흥안리에서 합류한 후 산 사이를 따라 곡류하는 최하류 구간을 강 이름 모양에 따라 곡강(曲江)이라고 호칭했다.[8] 역사조선 후기![]() 북천수 조성은 지맥 보호와 홍수 방지라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에서는 1802년(순조 2년) 1월 9일(신사)에 흥해 군수로 임명된 이득강(李得江)이[9] “조선 철종 때 읍성과 흥해의 진산(鎭山)인 도음산의 맥을 보호하고 북천에 둑이 없어 장마만 지면 수해가 나는 것을 보고 군민을 동원하여 북천에 제방을 쌓고 4리에 뻗친 북천수를 조성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10] 이때 매산리, 북송리, 마산리에 걸쳐 조성된 제방을 ‘북천방’(北川防)이라고 불렀고 여기에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 바로 북천수였는데, 이러한 이득강 군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26년에 ‘군수 이득강공 북천수 유적비’(郡守李公得江北川藪遺蹟碑)가 세워졌으며, 이 비석은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1] 적힌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후 1866년(고종 3년)에 발생했던 병인양요 당시 참전하기도 했던[13] 지홍관(池弘寬)이 흥해 군수로 부임한 뒤 추가로 나무를 심으면서 북천수는 폭 400m, 길이 4km에 달하는 숲이 되었다고 전해진다.[14]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에는 3개의 지홍관 군수 송덕비 또한 전시되어 있다.[5] 다른 기록으로는 《흥해읍지》(興海邑誌)에서 숲이 서쪽 백련사(白蓮寺)에서 동쪽 곡강까지 이르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15] 하지만 1891년과 1900년에 각각 흥해 군수로 부임한 안종덕(安鍾悳)과 남만리(南萬里)의 경우 북천수를 훼손하기도 했다.[16] 1908년에는 북천수의 중요성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북송정비중수비’(北松亭碑重修碑)가 세워졌는데, 이 비석에 따르면 북천수에 송정(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으며 비석은 정자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강점기까지는 북송동에 존재했으나 현재는 비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17] 이와 관련해 《북송정비각중수기》(北松亭碑閣重修記)에는 배경환(裵經煥)이 수교(首校)로 있을 때 뇌물을 받고 소나무를 베려하자 원로 군교 최재영(崔在榮)이 “네가 뇌물을 바치는 계책은 소나무를 해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금하는 것만 못하다. 소나무가 장차 없어질 것이니 영원히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다시는 뇌물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며 배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8]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북천수는 1915년에 을종요존예정임야(乙種要存豫定林野)[c]에 포함되었고, 2년 뒤인 1917년에는 삼림령 제10조[d]에 따라 보호명령이 내려져 국유림보호조합까지 설립되었다.[21] 1919년부터 1931년까지 흥해면장을 역임한 정기환은 식림에 중점을 두고 도벌을 경계했으며, 벌채 청원이 있으면 현장을 방문해 허가 여부를 판단했으며, 특히 북천수의 벌목만큼은 절대 금하였다.[22] 1935년과 1937년에 호안 공사가 일부 완료되자 흥해면에서는 더 이상 범람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숲을 불하받아 면유림으로 경영하기 위해 청원하여 1937년 7월 26일에 존치를 요하지 않는 제1종불요존임야(第一種不要存林野)[c]로 변경했다.[21] ![]() ![]() 1938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의 촉탁연구원 도쿠미쓰 노부유키(德光宣之)의 조사에 따르면, 북천수의 크기는 북송동와 마산동에 걸쳐 평균 160m의 넓이로 길이 약 2,400m, 면적 42ha이며, 부식과 자갈이 섞여 결합도가 약하고 습윤하며 깊이 1m 이상의 사양토 위에 조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임지의 90% 이상이 적송으로 구성된 단순림으로, 수고는 평균 20m에 가슴높이 직경이 30cm에서 70cm에 달하는 소나무가 지표의 고사리, 초본식물, 낙엽이 드러날 정도의 밀도로 열을 이루었으며, 동쪽과 남쪽 연변에는 수령 110년의 노거수도 적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외에도 버드나무, 팽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참빗살나무, 쥐똥나무도 섞여 있었다고 기록했다.[23] 1938년 10월 26일 동아일보 지면에는 홍수 피해를 막아주었던 북천수에 “도벌과 채토(採土)가 성행”하는 실태를 다루며 면당국의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한 기사가 실렸는데,[24] 이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북천수의 소나무들은 선박용 목재로 벌목이 되는 등 수탈의 과정을 겪었고, 개인 경작지가 증가하면서 숲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14] 한편 경상북도에서는 호안 하나로 완전한 수해방비를 기대할 수 없어 북천수가 여전히 중요하므로 지속적인 감독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에 1938년 2월 5일에 북송동와 매산동에 국유임야 3필지 30ha 가량을 보안림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한 데 이어, 1940년 2월 26일에는 마산동, 북송동, 매산동의 국유임야 7필지 16ha에 대해 국유림 편입을 건의해 관철시켰다.[21] 현재는 광복 직후에 심어진 소나무가 북천수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14] 북천수의 일부였던 흥해서부초등학교의 학교숲은 2000년에 생명의숲,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공동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25] 2003년부터 문화재청이 진행한 ‘마을숲 문화재 자원조사’에 따른 연구 보고서에서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북천수의 길이가 1,870m로 큰 감소는 없었으나, 그 폭이 70m로 비교적 크게 줄어 면적 감소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26] 2004년과 2005년에는 산림청이 진행하는 ‘전통마을 숲 복원사업’의 대상지로 선정되어 ‘흥해향토청년회’의 주도로 일대 정비를 거쳤다.[27] 2006년 1월 5일, 문화재청은 마을숲 문화재 자원조사 대상지 94개소 중에서 천연기념물 지정 가치가 크고 보호가 시급한 마을 숲 3개소를 우선 선정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했고, 여기에 북천수도 포함되었다.[28] 그리고 같은 해 3월 28일, 문화재청은 같은 조사를 통해 1등급으로 선정한 마을숲 57곳 중 천연기념물 지정 가치가 크고 보호가 시급한 경북 지역 마을숲 2개소인 북천수와 예천 금당실 송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29] 그러나 이후 2007년 7월 포항시의회가 “문화재청의 조사는 옛 문헌에만 의존해 이뤄져 현재의 소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지역과 위치도 다르며, 지금 남아 있는 것도 이후 자신을 포함한 당시 주민들이 해방 후 심었기 때문에 수령이 훨씬 적어 천연기념물 지정은 잘못됐다.”라고 주장하는 흥해읍 주민의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다.[30] 2010년에 실시된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의 연구에서는 수림지의 길이가 흥해서부초등학교를 포함하여 1,710m, 숲의 폭은 30~80m로 1938년 조사 결과보다 약 25%가 훼손되었다고 밝혔다.[31] 2012년에는 포항시 내에서만 소나무 3만 본 이상이 재선충에 감염되면서 북천수 내에서도 피해가 발생해 일부가 벌채되기도 했다.[32] 식생과 주변 환경![]() ![]() 북천수는 북천변을 따라 조성된 소나무와 곰솔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나무 숲은 흥해서부초등학교 내에만 존재하며 곰솔 숲은 천변을 따라 길게 분포되어 있다.[1] 국립문화재연구소의 2010년 연구에 따르면 흉고직경 25cm 이상의 소나무, 곰솔이 식재된 지역이 50,603m2로 나타났다.[33] 또한 대상법과 방형구법을 이용한 결과 교목-아교목 4,105주, 관목 166주로 총 4,339주가 식재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34] 관찰된 식물은 총 209종류였으며, 봄에 108종류, 여름에 50종류, 가을철 51종류가 관찰되었다.[35] 토양은 양질사토, 사양토, 사질식토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균 수소 이온 농도 지수(pH)가 4.80으로 약한 산성 토양이었다.[33] 또한 토양 내 유기물이 평균 2.42%로 전국 산림 토양의 평균값보다 낮은 값을 나타냈다.[36] 마찬가지로 방형구법을 사용한 문화재청의 2003년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토양경도가 12~13mm(1kg/cm2)로 매우 심하게 나타났으며, 수목 활력도가 13.4 정도로 양호하지만 가루깍지벌레 피해가 매우 심하고 그을음병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37] 이는 201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서도 유사한데, 이때에도 진딧물, 가루깍지벌레, 소나무좀, 솔잎혹파리 등의 수목병 및 해충이 발견되었으나, 수림지 전체적으로 병해충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흥해서부초등학교 내에 있는 소나무의 경우 그을음병이 심각했으나, 이를 제외한 수림지는 부분적으로 깍지벌레, 진딧물, 소나무좀의 피해가 나타났고, 일부 수목에 설해(雪害)로 인한 줄기 부러짐 현상이 발생했다.[38] ‘2010년 천연기념물 수림지 실태 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북천수는 수림지의 규모가 커서 야생동물의 은신처 및 서식처로 역할이 가능했으며, 외곽으로 대규모의 산림이 위치하고 있어 야생동물의 유입이 용이했다. 서식이 확인된 야생 조류는 188개체로, 봄철에 출현한 야생조류의 종수가 가장 많았고 가을철에 가장 적었다. 출현 현황을 살펴보면 꼬마물떼새, 뻐꾸기, 알락할미새 등의 여름 철새가 11종, 흰뺨검둥오리 등의 겨울 철새가 1종, 청다리도요 등 나그네새 1종, 참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멧비둘기 등 텃새 14종 확인되었으며,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 1개체가 관찰되기도 했다. 기타 포유류로는 청설모, 너구리, 고라니도 일부 발견되었으며, 파충류는 능구렁이 사체가, 양서류는 참개구리와 청개구리의 서식이 확인되었다.[39] 동서로 흥해분지를 통과하는 곡강천은 6월부터 9월까지 연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집중되는 계절적인 강수 편차, 깔때기 모양의 유로 형태, 좁은 유역 면적, 신생대 제3기 층에서 유입되는 다량의 풍화물 등에 영향을 받아 유량 변동이 심하고, 하절기에 범람이 잦아 농경지에 홍수 피해를 일으켜 지역 농민들에게 잦은 피해를 입혔다. 따라서 북천수의 조성의 주된 이유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40] 북천수의 해발고도는 20~25m가 27.8%를 차지하며,[41] 외곽 산림과 하천 제방 일부 지역을 제외한 숲 주변 지역의 97.4%가 경사가 0~5°인 평탄지로,[42] 북송리가 위치한 곡강천 남쪽이 해발고도가 낮아 하천의 범람이 북송리 방향으로 발생했고, 이는 수림지가 북송리에 조성되는 연유가 되었다.[43] 1961년에 신광분지와 흥해분지의 경계가 되는 산지 사이에 협곡을 막아 용연저수지가 축조되었으며, 2014년 이후 저수지 제방을 댐식으로 재건설하여 태풍으로 인한 집중호우 시에 방류량을 조절해 홍수 피해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44] 한편, 북천수 동쪽으로는 국도 제7호선이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숲으로 접근 가능한 도로는 왕복 2차선의 지방도가 유일하다. 주변 토지는 논, 밭, 과수원 등의 경작지와 농가주택으로 이용되고 있으며,[45] 경작지의 일부는 과거 수림지였던 지역을 잠식한 것으로 판단된다.[46] 북천수 주변에 분포한 문화유산으로는 천연기념물 제561호로 지정된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 경상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된 남미질부성,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제451호로 지정된 흥해향교 대성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제250호로 지정된 제남헌 등이 있다.[47] 문화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북송리에 속해 있는 자연부락인 큰마을, 건너각단, 양촌 마을 등의 주민들이 북천수에 모여 동제를 지냈다. 또한 이날 오후 3시에는 건너각단 마을 앞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올렸는데, 저녁에 달집태우기를 한 후 전년도에 묻어둔 간수 병을 파내어 간수의 상태를 보고 그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동시에 다시 간수를 채우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이러한 풍습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과거에 건너각단 마을에 큰 화재가 일어난 후 마을을 지나가던 풍수가 “마을 앞산이 ‘불 화’(火) 자의 형상이어서 마을에 불이 자주 나고, 불이 나면 반드시 연속해서 세 번 불이 난다.” 라고 말했고, 마을 주민들이 이에 대한 방책을 묻자 “산 정상에 구덩이를 파고 간수를 묻어 앞산의 화기를 눌러야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을 주민들은 산 정상에 소금물을 묻고 이 간수가 마르지 않도록 살피게 되었다.[48] 간수는 별도로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마을 주민이 햇소금에서 간수를 모아두었다가 사용하는 편이며,[49] 산 정상에서 간수단지를 파내면 지난해에 꽂아놓은 솔가지를 제거한 뒤에 얇고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단지 속에 넣어 간수가 줄어든 양을 잰다. 간수가 많이 줄었다면 올해 흉년이 든다고 하고, 적게 줄었으면 풍년이 든다고 점치며, 줄어든 만큼 간수를 넘칠 정도로 부어주어 간수단지를 채운다.[50] ![]() ![]() 1923년 9월 1일에 발행된 《개벽》 제39호에서는 〈흥해의 북송정〉(興海의 北松亭)이라는 제목으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단절, 문화유산의 훼손, 자연 파괴와 공동체의 상실 등을 안타까워 하는 산문이 게재되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시인 전상렬이 1972년에 발표한 산문집 《동해엽신·기타》(東海葉信·其他) 중의 〈세로송림〉(細路松林)에는 당시 흥해서부국민학교의 재산으로 관리되며 지역 주민에게 공원으로 제공되었던 북천수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로부터 북송리를 중심으로 전해 내려오던 ‘포항흥해농요’는 1970년대부터 농업의 기계화와 이농현상으로 인해 전승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북송리와 죽천리를 중심으로 학계의 채록과 연구가 이뤄졌으며, 2018년에는 지역 주민으로 이루어진 ‘포항흥해농요보존회’가 설립되어 농요 전승 및 복원을 위해 힘써왔다.[53] 이 과정에서 보존회는 북천수 일대에서 ‘모심는소리’, ‘논매는소리’, ‘지게목발소리’, ‘어사용’과 같은 흥해농요 재현 행사를 진행하거나,[54] 예천공처농요와 교류전을 갖기도 했다.[55] 그리고 포항흥해농요는 2024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는 포항시 최초의 무형유산 단체종목 지정이었다.[53] 한편 포항시청에서는 맨발 걷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2020년 8월에 시내 주요 도시숲, 수변공간을 대상으로 맨발걷기에 편리하고 경관이 우수한 ‘맨발로(路) 8선’을 발표했는데, 북천수는 8선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6] 이후 이 목록은 2022년 6월까지 30선으로 확대되었다.[57] 그러나 2023년 말에는 포항시청이 제출한 북천수 세족시설 설치 예산 1,500만 원에 대해 시의회가 전액 삭감을 추진하다 주민 반발로 철회되기도 했다.[58] 이외에도 흥해읍에서는 흥해향토청년회의 주관으로 2022년부터 흥해 관광명소 9경(九景)을 알리는 ‘흥해 9경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북천수는 9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9]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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