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판 브뢰켈런
요하너스 프란시스퀴스 "한스" 판 브뢰켈런(네덜란드어: Johannes Franciscus "Hans" van Breukelen ˈɦɑns fɑm ˈbrøːkələ(n)[*][2], 1956년 10월 4일, 위트레흐트 주 위트레흐트 ~)은 네덜란드의 전직 프로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골키퍼였다. 그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KNVB)의 기술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판 브뢰켈런은 더 블리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BVC의 유소년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76년, 그는 위트레흐트에 입단하여 142번의 경기에 출전했다. 노팅엄 포리스트에서 2년을 보낸 판 브뢰켈런은 1984년에 PSV로 이적했다. PSV 소속으로, 그는 6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고, 컵대회도 3번 우승했다. 1988년, 판 브뢰켈런은 벤피카의 승부차기 6번째 주자를 막아내며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랐고, 같은 해에 3관왕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는 네덜란드 올해의 골키퍼로 4차례 선정되기도 했다. 판 브뢰켈런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경기에도 73번 출전했다. 그는 유로 1988에 네덜란드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했다. 또한 판 브뢰켈런은 대회 결승전에서 페널티 킥을 선방하였다. 그는 1990년 월드컵과 유로 1992에도 참가했다. 현역 은퇴 후, 그는 비축구 영역에 사업에 뛰어들었고, 동시에 위트레흐트의 단장을 역임했고, 2010년부터 2016년까지는 PSV 이사진의 일원이었다. 한스 판 브뢰켈런은 3관왕과 함께 국가대항전 우승을 1988년 같은 해에 거둔 5명밖에 안되는 네덜란드 선수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머지 4명의 선수들은 그의 동료인 베리 판 알러, 로날트 쿠만, 헤랄트 파넨뷔르흐, 그리고 빔 키프트이다. 초창기판 브뢰켈런은 위트레흐트 출신으로, 1964년에 더 블리트에서 아마추어 구단인 BVC에서 축구를 시작했다.[3][4] 1974년, 그는 17세의 나이에 BVC의 1군으로 도약했다. 몇 달 후, 판 브뢰켈런은 위트레흐트에 입단했다.[3][5] 유년 시절, 그는 교사가 되기 위해 학업을 병행했다. 그는 위트레흐트에 입단한 이후에도 교육학을 전공했고, 교편을 잡기도 했다.[6][7] 클럽 경력위트레흐트와 노팅엄 포리스트판 브뢰켈런은 처음에 위트레흐트 2군에서 활약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고예 이스타토프와 얀 스트롬베르흐를 보좌할 3번째 골키퍼로 올라섰다.[5] 1977년 3월 20일, 판 브뢰켈런은 0-3으로 패한 스파르타 로테르담과의 원정 경기에서 주전 이스타노프를 대신해서 출전하며 신고식을 치렀다.[8] 그는 이후 4년 동안 주전으로 도약하며 주전 선수가 되었다.[9] ![]() 1980-81 시즌, 위트레흐트는 리그 3위의(구단의 리그 역대 최고 성적) 성적을 거두었고, 1년 뒤, 판 브뢰켈런의 위트레흐트는 KNVB 베커르 결승전에 올랐다.[8] 1982년, 위트레흐트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구단은 긴급하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판 브뢰켈런을 매각할 의사를 밝혔다. 본래, 1982-83 시즌 2차전까지 진행될 때까지 그의 이적 징조가 없었다. 그러나 9월이 되자, 판 브뢰켈런은 결국 노팅엄 포리스트로 이적했다.[5] 그는 위트레흐트에서 도합 142번의 에레디비시 경기에 출전했다.[1] ![]() 피터 실튼이 노팅엄 포리스트를 떠난 가운데,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이 판 브뢰켈런을 새 수문장으로 낙점했다. 노팅엄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위트레흐트에 £200,000의 이적료를 냈다. 그는 브라이튼 & 호브 앨비언과의 첫 경기에서 바로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판 브뢰켈런은 13번의 리그 경기 끝에 부상을 당해 4개월을 빠지게 되었다. 재활 후, 판 브뢰켈런은 노팅엄 포리스트의 선발진에 복귀하였고, 소속 구단은 UEFA컵 진출권을 손에 넣었다. 1983-84 시즌, 판 브뢰켈런은 36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해 11번의 경기에서 무실점을 달성했다. 소속 구단은 3위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 시즌 정상에 오른 리버풀과는 승점 6점차였다. UEFA컵에서 노팅엄 포리스트는 준결승전까지 올랐지만 안데를레흐트에 패퇴했다.[10] 같은 해, 노팅엄 포리스트와 판 브뢰켈런은 잦은 국가대표팀 차출을 놓고 불협화음을 냈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판 브뢰켈런은 1983-84 시즌을 끝으로 잉글랜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6][9] PSV판 브뢰켈런은 PSV에 입단하여 다시 모국을 밟았다. 그는 1년차에 에레디비시 우승을 안타깝게 놓쳤고, KNVB 베커르에서는 판 브뢰켈런의 친정 위트레흐트와의 준결승전에서 패했다.[5] 그러나, PSV는 이어지는 2년동안 리그 정상에 올랐는데, 이로서 판 브뢰켈런은 생애 첫 우승을 경험했다.[11][12] 1987년, PSV와 페예노르트와의 경기에서 판 브뢰켈런은 네덜란드에서 판 브뢰켈런의 터석풀(het polletje van Van Breukelen)로 회자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공을 향해 도약했을때 손에 잔디를 쥐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공이 굴절했다. 판 브뢰켈런은 공을 다시 잡으러 서둘렀지만, 심판은 이를 규정 위반으로 보았는데, 그는 바로 공을 집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페예노르트는 막판 프리킥 기회를 잡았고, 기여코 경기는 1-1로 끝났다.[13] ![]() 이후 판 브뢰켈런은 언론과 축구계에서 대대적으로 조롱을 당하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87-88 시즌에 들어 극복했고, 이 시기는 그의 경력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13] PSV는 이 시기에 리그 3연패를 거두었고, KNVB 베커르와 유러피언컵마저 석권했다.[14] PSV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상대하여 연장전까지 득점 없이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PSV가 6명의 주자가 모두 골망을 가른 가운데, 벤피카의 안토니우 벨로수가 낮게 왼쪽 구석으로 찬 공을 판 브뢰켈런이 막아냈다. 그 결과 PSV가 유러피언컵의 주인공이 되었다.[15][16] 판 브뢰켈런은 훌륭한 활약을 바탕으로 1988년 네덜란드 올해의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그는 현역 시절에 이 상을 4번 받았다.[6][15] 1988-89 시즌, PSV는 다시 2관왕을 달성했다.[17] 판 브뢰켈런과 PSV는 1990년에 KNVB컵을 우승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리그 우승을 2번 추가했다.[18][19] ![]() 1993-94 시즌, 판 브뢰켈런은 공개적으로 동료 선수인 호마리우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 결과 골키퍼는 PSV 구단으로부터 벌금 징계를 받았다. 또한 아약스와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3차례 경고가 누적되어 결장하기도 했다. 1993년 초, 판 브뢰켈런(은 은퇴가 다가오는 가운데) 구단이 그에게 단장직을 제안하길 기대했지만, PSV는 프랑크 아르네센을 임명했다. 그는 이후 후보 골키퍼로 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구단은 이도 거절했다.[8][20] 아약스는 그에게 후보 골키퍼직을 제의했지만, 판 브뢰켈런은 이 제의를 거절하고 은퇴를 선택했다.[21] 1994년 10월 6일, 판 브뢰켈런은 PSV에서 헌정 경기를 치렀다. 1988년 PSV의 유러피언컵 우승 주역은 두 선수단을 상대했다. 전반에는 유로 1988을 우승한 네덜란드를 상대로, 그리고 후반에는 PSV의 역대 최고 전설 선수진을 상대로 경기했다.[22] 판 브뢰켈런은 PSV에서 도합하여 308번의 에레디비시 경기에 출전했고, 컵 경기에서 37번, 유럽대항전에서 46번의 경기에 출전했다.[3] 국가대표팀 경력![]() 판 브뢰켈런은 독일과의 1980년 10월 11일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다. 그 후, 그는 1982년 월드컵, 유로 1984, 그리고 1986년 월드컵 예선전에 출전했지만, 네덜란드는 위의 세 대회 모두 본선행에 실패했다. 판 브뢰켈런은 유로 1988 예선전에서 기량이 하락한 가운데 부진했었는데, 1987년 헝가리전을 앞두고서 리뉘스 미헐스 감독은 그를 대신하여 요프 힐러를 골문 앞에 세웠다.[23] 그 후로, 판 브뢰켈런은 다시 1군으로 복귀했다. 예선을 통틀어 그는 8경기에 출전해 단 1골만을 실점했고, 네덜란드의 1980년 이래 첫 국제 대회 진출로 이끌었다.[24] 유로 1988에서 네덜란드는 간신히 조별 리그를 통과했지만, 준결승전에서 개최국이자 숙적 서독을 2-1로 이겼다.[24] 판 브뢰켈런의 말에 따르면 "유로 결승전 진출보다 독일을 이긴 것이 더 중요했다"라고 밝혔다.[25] 네덜란드는 이어지는 소련과의 결승전에서 2-0으로 이기며 유럽 정상에 섰다. 판 브뢰켈런은 이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내주었지만, 뒤이어 이고리 벨라노프가 찬 공을 막아냈다.[8][26] 대회 종료 후, 그는 대회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었다.[27] 판 브뢰켈런과 국가대표팀은 1990년 월드컵 본선에도 올랐지만, 16강에서 서독에게 패하며 조기에 짐을 쌌다.[24]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결속력이 와해된 가운데 본선 경기에 임했고, 결국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판 브뢰켈런은 이 월드컵을 "현역 시절 최악의 순간"으로 회자했다.[28] 서독과의 경기에서, 판 브뢰켈런은 루디 푈러와 충돌했는데, 그는 푈러에 고함을 쳤다. 이후 패싸움이 벌어졌고, 푈러(그리고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퇴장당했다.[26] 한편 잉글랜드와의 조별 리그 경기는 판 브뢰켈런의 54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였는데, 이로서 그는 종전에 헤위스 판 더르 머윌런이 세웠던 역대 최다 골키퍼 출전 기록을 경신하게 되었다. 73번째 국가대표팀 경기 끝에 은퇴한 그는 2003년에 에드빈 판 데르 사르가 74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르기 전까지 네덜란드의 역대 최다 국가대표팀 경기 출전 골키퍼로 이름을 올렸었다.[24] 판 브뢰켈런이 치른 3번째이자 마지막 국제 대회는 유로 1992였는데, 네덜란드는 준결승전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덴마크와 2-2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4-5로 패했고, 판 브뢰켈런은 한 명의 주자도 막아세우지 못했다. 이 경기는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가 되었다.[24] 은퇴 후판 브뢰켈런이 은퇴한 후, 그는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그는 소매업체 브레이콤의 부사장을 역임했다.[29] 축구계 복귀 의사를 밝힌 판 브뢰켈런은 구단의 제의를 더욱이 기다렸다. 트벤터가 1996년에 그의 단장직을 제의했지만, 판 브뢰켈런은 이 직위를 거절했다.[30] 1997년, 그는 위트레흐트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도전자-계획'의 구상을 꺼냈는데, 이는 위트레흐트의 경기 방식과 구단의 목적을 명확히 드러냈다.[5] 비록 그는 2000년 1월에 만료 없는 계약을 맺었지만, 판 브뢰켈런은 그 해 말에 위트레흐트 이사진의 확신감 부족을 확인하고 구단을 떠났다.[29][31][32] 판 브뢰켈런은 2000년에 다시 사업 전선에 복귀했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HvB를 창업해 사업을 위한 강의 및 훈련에 특화된 교육업체를 경영했다.[9] 판 브뢰켈런은 이후 2개 업체를 더 창업했다.[29] 2001년 10월, 판 브뢰켈런은 감독 '훈련사 감독 1급' 면허를 취득하면서 프로 구단의 수석 코치나 아마추어 구단의 감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33] 2005년을 기점으로, 그는 기술 및 스포츠 두 영역에서 혁신을 이끄는 네덜란드 재단의 단장을 역임했다.[34] 2010년 7월, 판 브뢰켈런은 PSV의 이사진에 합류했다.[35] 그의 이사진 합류는 구단의 의사 결정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는 PSV 연합(Vereniging PSV)의 추천으로 성사되었다.[36] 2013년, PSV의 성적 부진에 실망한 판 브뢰켈런은 경영 방식과 구단 문화의 쇄신을 기대했다. 그는 휘스 히딩크를 비롯해 여러 PSV 전직 선수들과 협찬사에 접근해 그를 도울 것을 부탁했다.[37] 2016년 6월, 판 브뢰켈런은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KNVB)의 기술 단장으로 취임했다.[38] 그는 2018년에 이 직위를 내려놓았다. 경력 통계클럽
국가대표팀
수상
각주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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