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대관구
함부크르 대관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함부르크 지역에 있었던 나치 독일의 대관구이다. 그 이전인 1925년부터 1933년까지는 나치당의 지역 조직 중 하나였다. 역사원래 나치의 대관구(Gau) 조직은 1926년 5월 22일 나치당 회의에서 지역당 조직 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창립한 구역이었다. 이후 1933년 나치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주 단위 행정구역이 당의 대관구 행정구역으로 대체되었다.[1] 각 대관구를 지휘하는 대관구지휘자는 점점 더 권력이 세지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외부에서 거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지역 대관구지휘자는 정당 행정 뿐 아니라 정부 직책에도 관여하여 선전 감시 등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으며,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 소집과 각 대관구 방어작전 역할도 맡았다.[1][2] 나치당의 초기 지역당 형태였던 1925년부터 1929년까지는 함부르크 대관구의 대관구지휘자는 요제프 클란트, 알베르트 크렙스, 힌리히 로제였으며 1929년부터 종전인 1945년까지는 카를 카우프만이 이를 맡았다.[3][4] 함부르크 대관구의 초대 대관구지휘자인 요제프 클란트는 짧은 기간 이 직무를 수행하다 1927년 사망했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의 대관구지휘자이기도 했던 힌리히 로제는 동유럽의 독일화 계획인 제네랄플랜 오스트의 일환으로 1941년 수립한 동방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을 맡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 롬인(집시), 공산주의자의 집단살해 및 지역 주민 박해를 하는 등 전쟁범죄 행위를 하였다.[5] 그는 1948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가석방되었고 소련의 인도요청이 거부되었으며 1964년 사망했다.[6]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대관구지휘자를 맡은 알베르트 크렙스는 1932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나치당에서 추방되었으며, 히틀러의 통치에 비판적이였던 그는 전후 회고록을 출판한다.[7] 함부르크 대관구의 마지막 대관구지휘자인 카를 카우프만은 전후 수감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풀러난다. 그는 함부르크가 전쟁 마지막 날 연합군에 항복하여 도시가 더 파괴하지 않도록 구했다는 "깨끗한 대관구지휘자" 신화를 만들어냈으나, 나중에 이 주장은 논파되었다. 또한, 그는 함부르크가 "나치 시기 자유로웠던 도시"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고 주장했으나, 1941년 9월 연합군의 함부르크 대공습 이후 유대인 전원추방명령을 내린 최초의 대관구지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또한 논파되었다. 카우프만은 1969년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8] 함부르크 대관구 내에는 네움자메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이 수용소에는 106,000명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그 중 55,000명이 사망했다.[9]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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