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년(중종 6년) 음력 6월 15일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과 후궁숙의 홍씨의 아들로 태어났다[4]. 인종, 명종,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 등의 이복형이다.
생모 숙의 홍씨는 남양 홍씨 출신으로, 중종에게 가장 많은 총애를 입은 후궁이라고 한다[3].
왕자 시절
8살 때인 1518년(중종 13년) 음력 12월 28일 정식으로 해안군(海安君)에 책봉되었다[5]. 1522년(중종 17년) 중종은 자신의 자녀들의 집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간원이 그 역사가 사치스럽다는 상소를 올려 역사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다. 이때 해안군의 집에 수축할 예정이었던 연못도 수축이 중지되었다[6].
1533년(중종 28년)에는 왕세자(훗날의 인종)의 양제와 해안군의 부인을 간택하라는 전교가 동시에 내려졌다. 그러나 해안군의 부인에 대한 간택 단자만 내고 세자의 양제 간택 단자를 내지 않은 이가 많아, 양제 간택을 먼저 한 후에 해안군의 부인을 간택하게 되었다[7]. 당시 23살이던 해안군은 이미 부인 류씨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었으나, 류씨가 1년 전인 1532년(중종 27년)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부인을 간택하게 된 것이다[3].
한편 해안군은 1542년(중종 37년) 음력 1월 8일 3차례나 연고를 핑계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10], 1546년(명종 1년) 음력 2월 19일 사헌부에 의해 다시 탄핵되었으나 이때는 명종의 배려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11]. 1561년(명종 16년) 음력 4월 3일에는 해안군의 사위 김규가 강경 시험 병과에 합격하였는데, 이 사실을 두고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공정하지 못한 선발이라며 비판하였다[12].
사망과 평가
1573년(선조 6년) 음력 8월 4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해안군이 사망하자 당시 대신들은 선조에게 정조시[주 1] 하기를 청하였다[13]. 1788년(정조 12년) 정조로부터 정희(靖僖)의 시호를 받았다[14]. 묘소는 양주 신혈리에 마련되었다[4].
해안군은 항상 조용하고 책을 좋아하였으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또 용모도 단정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러한 해안군의 성격을 두고 중종은 "나의 아들 중에 가장 침착하고 삼가 들떠 있지 아니함에 해안군 같은 아이가 없다."라고 칭찬하였다. 또 중종은 자신의 잠저를 해안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해안군은 항상 검소하여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가도 그곳이 왕자의 집인줄 몰랐다고 한다. 또 병으로 말을 잘 하지 못하게 됐을 때에도 항상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명종은 해안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의를 보내기도 하였다[3][4].
해안군은 2명의 정부인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진주 류씨류순정의 손녀로, 아버지는 류홍이다. 류씨는 자녀를 낳지 못 하고 1532년(중종 32년) 2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우찬성에 추증된 거창 신씨 신홍유의 딸이며, 딸을 하나 낳았다. 신씨는 1567년(선조 즉위년) 음력 9월 사망하였으며, 해안군의 묘소에 다른 봉분의 형태로 합장되어 있다. 해안군은 측실을 두었으며, 이 측실들이 6남 4녀를 낳았다[주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