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머리고지 전투 (1953년)![]()
화살머리고지 전투(Battle of Arrowhead Hill)는 휴전 직전인 1953년 여름, 철원의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281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사단장, 김웅수준장)을 받고도 방어하기 위한 두 차례의 방어전투를 치르면서 고지를 성공적으로 사수한 전투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국군과 유엔군, 공산군은 모두 그 전까지 구축한 전선을 유지하면서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고지 쟁탈전, 수색정찰전, 참호전[1]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공군은 철원 평야에서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백마고지와 화살머리 고지(281고지)를 점령하고자 공격을 시도했고 국군은 철원 평야가 감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백마고지 및 화살머리고지의 완전한 확보를 위한 방어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개요화살머리고지 전투는 1953년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 한국전쟁 휴전(1953년 7월 27일)을 앞두고 6월 29일~7월 11일 중공군 제 73사단 병력과 국군 제2사단(사단장,김웅수준장) 사이에서 2차에 결쳐 벌어진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다. 화살머리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일대에 있는 고지로 백마고지의 남서쪽 3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281m 고지이다. 화살촉 모양으로 남쪽으로 돌출된 형태를 띠고 있어서 그러한 이름으로 불린다. 강원도 평강군, 철원군, 김화군을 잇는 지리상의 삼각지대이며 화살머리고지 또한 포함하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는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을 공격하기 위한 조선인민군의 본거지 기능을 했다. 이 지역의 확보는 곧 중부전선의 확보로 이어지기 때문에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철의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지역의 특성상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지만 적이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난공불락의 여건 하에 붙여졌다.[2][3] ![]() 배경철원평야에서 국군 제2사단과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23군은 1953년 6월 12일에 제29사단 제205연대를 백마고지로 투입시켜 공격을 실시했으나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의 철저한 진지방어와 강력한 화력에 의해 실패했다. 이에 중공군은 제73사단을 화살고지로 투입시켜 국군 제2사단을 물리쳐서 고지를 점령하고 백마고지 측방을 위협함으로써 두 고지를 동시에 탈취하기 위하여 먼저 화살머리고지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다. 원인1953년 6월 12일 중공군 제23군 예하의 제69사단 제205연대를 백마고지에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의 방어를 뚫지 못한다. 백마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중공군이 추가적으로 제73사단 병력을 투입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백마고지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3km 떨어진 화살머리고지이다. 화살머리고지는 경원선 철도와 연천-철원을 잇는 교통로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백마고지와 더불어 중부전선 방어를 위한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빼앗기면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평강·철원·김화’ 지역으로 향하는 보급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4] 백마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중공군이 화살머리고지로 눈을 돌리어 추가적인 병력을 투입한 것은 화살머리고지를 먼저 점령한 후 백마고지의 측면을 재공격하여 두 고지를 모두 점령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1953년 6월 20일-30일 화살머리고지에 대한 1차 공격이 시행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7월 6일-11일에 2차 공격을 가했다. 전개중공군 공격 및 국군 방어중공군 제73사단은 화살머리고지를 두 차례 공격을 실시했다. 1차는 1953년 6월 29일~6월 30일에 2차는 7월 6일~7월 11일에 실시했다. 화살머리고지 지역은 원래 미군 제3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2월 29일, 국군 제2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작전지시에 따라 이 전투지역을 인수를 받은 것이다. 국군 제2사단은 우측에 미군 제2사단과 좌측에 미군 제7사단과 전선을 연결하고 전투지역 방어를 맡은 것이다. 국군 제2사단은 제31연대를 우측,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포함한 지역인 좌측은 제32연대를 배치하고 제17연대를 예비로 방어에 임했다. 국군 제2사단은 95퍼센트 수준의 병력과 장비를 유지하고, 군단의 미군 제12포병대대를 포함하여 제15, 37, 674포병대대의 화력지원과 미군 제5공군의 전술공군 화력 지원도 가능하고 보급도 충분한 편이었다. 제1차 전투6월 29일,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는 화살머리고지 전방에 전초진지 두 개를 구축하고 방어하면서 서북방을 공격을 해봤지만 중공군은 제32연대의 전초진지를 공격했다. 국군 제2사단은 제32연대 제2대대는 동굴작전으로 방어하라고 하고 제17연대 제3대대를 투입하여 적군을 물리치고, 다시 공격해오는 적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은 32명의 전사자와 3명의 실종자, 그리고 44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국군 제2사단은 중공군을 400여명을 사살하고 3명의 포로를 잡고 20여 정의 소총을 노획했다. 제2차 전투7월 6일, 중공군 제73사단은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공격을 개시한 제218연대는 1개 소대가 지키고 있던 두 개의 전초진지 공격하여 7월 7일에 점령했다. 국군 제2사단은 제17연대 3대대를 제32연대에 배속시켜 역습에 감행했다. 그 결과, 좌측 진지 하나만 탈환할 수 있었다. 7월 8일, 국군 제2사단은 제31연대 제2대대를 투입시켜 우측 진지 탈환하라고 했고 이것마저 탈환했다. 7월 9일, 중공군의 공격으로 진지를 다시 중공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국군 제2사단은 제31연대 1대대를 투입시켜 진지를 다시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국군 제2사단장 (김웅수준장)은 31,32연대를 동시에 야간에 투입시켜 전초진지 뿐만 아니라, 그 후방에 위치한 중공군의 중간 거점까지 공격하려는 과감한 역습작전을 계획했다. 7월 11일, 국군 제2사단장 (김웅수준장) 시 에 제31, 32연대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제31연대는 전초진지를 탈환에 성공하고, 제32연대는 그 후방에 위치한 중공군 중간 거점을 장악한 후에 철수하여 역습작전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로써 국군 제2사단은 백마고지왈 화살머리고지를 포함해서 전투지역을 방어하고, 두 고지를 탈취하려던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결과 및 의의이 전투로 국군 제2사단은 180명의 전사자와 16명의 실종자, 77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그렇지만 국군 제2사단은 중공군 1,300여명을 사살하고 100여 정의 소총과 4,700여 발의 수류탄을 노획한 성과를 얻었다. 휴전이 예정된 상황에서 이전의 전면전이 진지전으로 변화된 시점에 발생한 고지 쟁탈전 중 국군 제2사단의 역습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으며 이후 휴전으로 이어진다. 휴전 직전의 치열했던 고지쟁탈전의 결과로 제 1차 전투에서 중공군 400여 명을 사살하고 3명의 포로를 생포하였으며, 20여 정의 소총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 2사단에서는 32명의 전사자와 3명의 실종자, 4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제 1차 전투와 2차 전투를 모두 합하였을 때, 적군 약 1,300여 명을 사살하고 10명의 포로를 포획하였으며, 100여정의 소총과 4,700여 발의 수류탄을 노획하였으나, 국군 212명[5](180명이라는 자료도 있음.)이 전사하고 16명의 실종자와 7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축차적인(신중하게 단계를 거치는) 역습보다 과감한 역습이 더욱 필요하고, 지상이나 공중화력지원이 용이한 주간 작전보다 중공군이 흔히 실시하는 야간 작전을 수행한 것이 오히려 중공군의 허를 찔러 역습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전훈을 도출할 수 있었다.[6] 관련 사건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은 2018년 9월 18-2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남북은 DMZ 내 시범적 공동유해발굴을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진행하기로 합의함.
유해발굴 진행 상황
궁예 도성 유적 발굴궁예 도성은 후삼국 시기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 철원의 도성이다. 강원도 철원군 홍원리 소재이며 흙과 돌을 섞은 토석혼축방식으로 만들어졌다.[11]
남북 연결도로 개설
DMZ 평화의 길![]()
같이 보기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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