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족
보자족은 후기 베다 시대에 인도에 위치했던 준인도아리아인 고대 부족들의 집합이었다. 이들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야다바의 분파로 묘사된다. 이들은 야두 왕에게서 갈라져 나온 사트바타족의 후예인 안다카족의 한 분파였다.[2] 보자족은 18개의 분파로 나뉘었으며, 중앙인도의 파르나사강 유역에 있는 므리티카바티를 수도로 삼아 통치했다.[3][4] 기원보자족의 기원은 자료마다 다르다. 마하바라타와 같은 대부분의 유명한 인도 서사시는 보자족을 야다바 부족의 분파로 언급한다. 비슈누 푸라나는 므리티카바티의 보자족이 사트바타의 아들 마하보자의 후손이며, 안다카족과 브리슈니족의 친족 부족이었다고 말한다.[5][3] 대영 왕립아시아학회지는 보야족이 이란에서 인도로 왔으며, 정착하는 곳마다 기존 부족들과 혼혈되었다고 이론화한다.[6] 라자스탄주, 말와, 카티아와르에 정착한 집단들은 야바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들은 아마도 마츠야 푸라나의 한 구절에서 믈레차족(외국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일 것이다. 마투라 지역에 정착한 집단은 수라세나족, 브리슈니족과 동맹을 맺어 수라세나 왕국을 건설했다. 사우라슈트라와 인더스강 삼각주에 정착한 집단은 사우비라족과 연관되었다.[6] 마하바라타의 아디 파르바 (85.3533)와 마츠야 푸라나의 한 구절 (34.30)에서 보야족은 믈레차(외국인)로 언급된다. 그러나 마츠야 푸라나의 또 다른 구절 (44.69)에서는 이들을 경건하고 종교 의식을 행하는 자들로 묘사한다.[1] 문학에서비다르바보야족의 가장 크고 번성했던 왕국은 비다르바 왕국이었다. 라마야나 서사시에서 비다르바의 보야 공주는 스와얌바라 의식에서 코살라 왕국의 아자 왕자와 결혼했다.[4] 아자는 강력한 이크슈바쿠 왕 라구의 아들이자 다샤라타 왕의 아버지였으며, 다샤라타는 다시 라마 신의 아버지였다. 루크미니의 아버지인 비다르바의 비슈마카 왕과 그의 아들 루크미 왕은 마하바라타에서 "보자-야다바"라고 불린다.[출처 필요] 마투라마투라의 보자족은 다른 야다바 부족과 동맹을 맺었으나 우그라세나 왕의 아들 칸사에 의해 왕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영웅 신 크리슈나가 그들을 도와 칸사로부터 마투라를 재정복하고 통치를 재확립했다.[7] 보자족의 18개 부족은 마가다의 강력한 왕 자라산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왕국을 떠났다.[7][8] 쿤티또 다른 저명한 보자 왕국은 쿤티 왕국이었다. 이곳은 쿤티보자 왕이 통치했다. 판다바의 어머니이자 쿠루 왕 판두의 첫째 부인인 쿤티는 쿤티보자의 양녀였다.[9] 므리티카바티므리티카바티의 보자족은 중앙인도의 파르나샤 (산스크리트어: पर्णाशा) 강 유역에 있는 말와고원 주변을 통치했다.[1] 이 보자족은 사트바타족을 지배했다.[10] 한 보자 왕은 위대한 쿠루크셰트라 전쟁에 참여했다.[5] 대영 왕립아시아학회지에 따르면, 이들은 파라슈라마와 동맹을 맺어 강력한 하이하야 왕 카르타비르야 아르주나를 물리쳤다. 그들의 성공으로 인해 그들은 한동안 나르마다강과 타프티강 계곡에 대한 우위를 차지했다.[11] 보자-안다카족야다바 영웅 크리타바르마는 때때로 안다카와 보자 씨족에 속하며 그들의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2] 마하바라타 서사시의 마우살라 파르바에서 안다카와 보야 씨족은 잔치 도중 술에 취해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거의 모든 야다바 왕족들이 사망했다.[12] 후손고아의 보자족은 적어도 서기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고아주, 콘칸 일부, 그리고 카르나타카주 일부를 통치했던 왕조였다. 고아는 파탈리푸트라의 마우리아 황제 또는 아마도 사타바하나에 대한 봉건적 충성을 통해 이 영토를 통치했던 보자족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그들의 수도는 고아주의 찬드라푸라 또는 찬드라우라(현대의 찬도르)에 위치했다.[13] 같이 보기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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