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푸스 아라브스가 248년에 다키아 속주 및 다키아 지역의 군단들인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을 기념하여 주조한 세스테르티우스. 주화 반대면에 각각 5군단과 13군단의 상징인 독수리와 사자를 참조.
게미나 제13군단(라틴어: Legio XIII Gemina, 쌍둥이 제13군단)은 제정 시기 로마군의 군단 중 하나이다. 갈리아 및 내전 시기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핵심 부대 중 하나였고, 그와 함께 기원전 49년 1월 10일에 그 유명한 루비콘강을 건넌 군단이었다. 서기 5세기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단의 상징은 사자였다.
역사
공화정 말기
제13군단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인들 간의 내부 분쟁에 대한 초기 개입 중 하나인, 벨가이족들과의 충돌하기 앞서, 카이사르가 기원전 57년에 창설하였다. 갈리아 전쟁 (기원전 58–51년) 기간, 13군단은 사비스 전투, 게르고비아 공방전에 있었고, 사료에는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13군단이 알레시아 전투에도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갈리아 전쟁 종료 후,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두 번째 집정관 수행을 거부했고, 그의 모든 지휘권을 포기하고, 기소를 위해 로마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정치적 인생의 종료나 내전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카이사르는 제13군단을 데리고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향했다. 13군단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의 보수적인 옵티마테스 세력과 카이사르 간의 이어진 내전 기간에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13군단은 디라키움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기원전 48년)에서 교전하며, 내전 내내 활동하였다.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군단은 해체되었고, 소속 군단병들은 전통적인 토지 부여와 함께 전역하였다. 그러나, 탑수스 전투 (기원전 46년) 및 최후의 전투 문다 전투 (기원전 45년)를 위해 13군단이 재소집되었다. 문다 전투 이후, 카이사르는 군단을 해산하고, 고참병들을 퇴역시키며, 이들의 고향 이탈리아의 농지들을 부여했다.
제13군단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전쟁 및 악티움 해전 이후에 다른 군단들에서 고참 군단병들로 인원이 추가되며, 코그노멘 ‘게미나’ ("쌍둥이", 다른 군단들의 일부로 이뤄진 군단들에 대한 별칭)를 얻었다.[2] 아우구스투스는 그 뒤에 13군단을 아드리아해에 있는 로마 속주일리리쿰 부르눔 (Burnum, 오늘날 크닌)으로 보냈다.
트라야누스 재위기, 13군단은 다키아 전쟁 (101–102년, 105–106년)에 두 번 모두 참전했고, 106년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속주를 지키도록 다키아 (오늘날 루마니아알바이울리아아풀룸)로 보내졌다.
게미나 제13군단의 벡실라티오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갈리에누스 황제 휘하로 참전했다. 갈리에누스는 군단을 기념하고, 군단의 사자를 나타내는 ‘안토니니아누스라는 주화를 주조했다 (259–260년).[3] 또다른 벡실라티오는 갈리아 제국의 황제 빅토리누스의 병력으로 있었다. 실제로 이 황제는 군단과 상징을 기념하는 금화를 주조했다.[4]
5세기에, ‘노티티이 디그나툼’에 따르면, 게미카 제13군단 (legio tertiadecima gemina)은 하이집트와 중이집트 사이의 전통적 경계에 있는 나일강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집트의 바빌론에서, 이짐트 국경 야전군 (Comes limitis Aegypti) 지휘하에 있었다고 한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