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을 기원으로 한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서기 48년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수로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성(姓)을 따서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 허염(許琰)은 가락국 수로왕비인 허황옥(許黃玉)의 35세손으로 전하며, 둘째 왕자인 거칠군(居漆君)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중엽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아들 허군언(許君彦)은 병부시랑(兵部侍郞)이고, 손자 허자(許資)는 병부상서(兵部尙書)이며, 허자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허송죽(許松竹)은 병부시랑, 둘째 허연(許延)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셋째 허징(許澄)은 상경(上卿)이었다.
4세손 허송죽(許松竹) 후손인 허대현(許大賢)을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尙書公派), 4세손 휘 허연(許延)의 장자 허인전(許仁全)을 파조로 하는 가락군파와 4자 허유전(許有全)을 파조하는 시중(侍中)공파, 4세손 허징(許澄)을 파조로 하는 징(澄)파 등 4개 파로 크게 분파되었다.
김해 허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하였다.
본관
김해(金海)는 경상남도 김해시의 지명이다.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가락국(駕洛國)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여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가 1012년(현종 4)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으나 1018년부터 의안군(義安郡: 昌原)·함안군(咸安郡)·칠원현(漆原縣: 漆原面)·웅신현(熊神縣: 鎭海)등을 영현으로 삼았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293년(충렬왕 19) 현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김해부(金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김해군이 되었고, 1981년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을 통합하였다.
분파도
1 허염 許琰
2 허군언 許君彦
3 허자 許資
4 허송죽 許松竹
4 허연 許延
4 허징 許澂
5 허각보 許恪保
5 허인전 許仁全 가락군파 (駕洛君派)
5 허유전 許有全 시중공파 (侍中公派)
5 허평 許枰
5 허상 許相 상서공파 (尙書公派)
6 허대현 許大賢 상서공파 (尙書公派)
6 허영 許榮
6 허화 許華
6 허창 許敞
6 허증 許增
7 허기 許麒 호은공파 (湖隱公派)
7 허린 許麟 중승공파 (中承公派)
7 허인부 許仁副 전직공파 (典直公派)
7 허구년 許龜年 증성군파 (甑城君派)
7 허언룡 許彦龍 판서공파 (判書公派)
분파
가락군파(駕洛君派) : 허인전(許仁全)
시중공파(侍中公派) : 허유전(許有全)
호은공파(湖隱公派) : 허기(許麒)
중승공파(中承公派) : 허린(許麟)
전직공파(典直公派) : 허인부(許仁副)
증성군파(甑城君派) : 허구년(許龜年)
판서공파(判書公派) : 허언룡(許彦龍)
상서공파(尙書公派) : 허상(許相)
상서공파(尙書公派) : 허대현(許大賢)
인물
허유전(許有全, 1243년 ~ 1323년) : 1274년(고려 원종 15년) 문과에 급제하여 1314년(충숙왕 1)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1] 시호는 충목(忠穆).
허옹(許邕) :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허기(許麒) : 신돈의 횡포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미움을 사 고성의 대섬에 유배왔는데 그 후 공민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고성 장산에 터전을 마련하고 조선이 건국되고 수차 부름이 있었으나 거절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호는 호은(湖隱)
허추(許錘) : 허유전의 증손자. 1438년(세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정언(右正言)과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을 역임하였다.
허선(許譔) : 1456년(세조 2)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성균관 학정, 병조정랑, 이조좌랑,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했으며 세조실록 편찬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허정(許禎) : 허선의 아들. 1494년(성종 25)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청주목사(淸州牧使), 영천군수(永川郡守),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허백기(許伯琦, 1493 ~ ?) : 허정의 아들,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1524년 형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526년 형조정랑, 1528년 경상도 도사, 1541년 헌납·장령, 1544년 사간·교리·동부승지, 1545년 형조참의, 1553년(명종 8)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562년 동지중추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정헌(正憲).
허수겸(許守謙, 1563 ~ ?) :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여현감(扶餘縣監), 병조정랑, 강진현감(康津縣監), 공주목사 등을 지냈다.
허경윤(許景胤) :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수로왕릉 봉분을 다시 쌓아올렸고, 병자호란 때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답을 팔아 의병을 모았다.
허국주(許國柱) : 조선 중기 의병장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侯)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모집하여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허동립(許東岦) :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와 오위도총부총관 등에 이르렀다.
허유(許愈) : 조선 후기 성리학자로, 한주 이진상의 제자이며 퇴계 학맥을 계승했다. 주리설을 연구하며 현실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경제·국방·국제 관계 등에 개혁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문장은 간결하고 교화를 중시했으며, 그의 시문은 후산선생문집(1910)과 속집(1964)으로 간행되었다.
허위(許蔿) : 한말의 의병장으로 13도의병연합부대 군사장을 맡아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