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5월 30일,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무학초등학교와 장충중학교, 중경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0년 개그맨으로 데뷔하며 연예계에서 활동했다. 1980년 중반 KBS 유머 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꽃 피는 봄이 오면> 등으로 시사 개그를 선보이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본인의 인기로 정계에 입성할 야망을 가졌으며 국회의원 선거에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성할 기회를 가졌으나, 임종석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하여 패배했다.
경력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서울에서 출신으로 중경고등학교(1979년), 동국대학교(1985년)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1980년, TBC 동양방송 개그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본격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1980년대 KBS 한국방송공사의 코미디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유머 일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등의 코너에서 당시 드물었던 시사풍자를 시도했으며,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코너에서는 ‘잘 돼야 될 텐데…’, ‘잘 될 턱이 있나?…’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머일번지》의 거침없는 시사풍자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미움을 받아, 중간에 프로그램의 방영이 중단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정당 활동
김형곤은 1998년 6월 17일에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으며 1999년에는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명예총재 특별보좌역을 거쳐 자유민주연합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 직위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2000년에 실시된 자유민주연합의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후보자 공천에서 안승근 용인대학교 교수에 밀려 탈락하자 자유민주연합에서 탈당했다. 김형곤은 서울 성동구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의 임종석 후보, 한나라당의 이세기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이후 뮤지컬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연기자로서의 활동을 했다. 성적 소수자들인 트랜스젠더 클럽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망
김형곤은 2006년 3월 11일에 평소와 반대로 사우나 직후에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 운동을 했고 이후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져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졌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향년 45세). 사후 시신은 연구용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기증되었고 유해는 이듬해에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어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 소재의 청아공원에 안장되었다.
김형곤이 자신의 개인 운전기사가 그만두려 하자 만류했으나 그 운전기사는 끝내 사직하였다. 이후, 그 운전기사를 최양락이 고용했다. 이에 분노한 김형곤이 1985년 6월의 어느날, 새벽 1시에 후배 희극 배우들을 대동하고 최양락의 집에 쳐들어가서 최양락을 집 밖으로 끌고 나와서 집단으로 구타했다. 어지간한 일로는 소송을 걸지 않는 기수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최양락은 이 때 김형곤에게 구타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으며 김형곤을 폭행죄로 고소했다. 이 사건은 1985년 8월 2일자 동아일보 12면에 게재되었다.[2]
결국 김형곤은 죽음으로 여론의 뭇매질을 비켜갔는데 2020년대에는 유명인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을 크게 부각시켜 인터넷에서 추방 운동을 벌이는 시대가 된 탓에 조형기가 과거에 저지른 음주운전 뺑소니 치사 사건을 네티즌들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려가면서 킬러 조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방송국에도 조형기만 나오면 "왜 살인자를 방송에 출연시키느냐"며 항의를 일삼은 끝에 조형기를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김형곤은 최양락에게 인간이길 포기한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고도 일찍 죽은 덕분에 이런 여론의 뭇매를 피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