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일본어: 元老 겐로[*])는 일본 제국에서 정부의 최고 수뇌에 있었던 중신들을 가리킨다. 일본 제국 헌법에서는 원로에 대한 규정을 명기하지 않았으며 원로는 헌법 외 기관으로 정하고 있다.[1]
때문에 법률 상 그 정의는 없지만 천황의 칙명 또는 칙어에 의해 원로로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으며, 천황의 자문에 답하여 내각의 경질이나 후임 내각총리대신 천거, 개전·강화·동맹 체결 등에 관한 국가의 최고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 원로에게는 황실의제령 (1926년 황실령 제7호) 제29조에 따라 궁중석차 제1계 제4위(추밀원 의장 다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운 인물을 "원훈"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메이지 정부에서 장기간에 걸쳐 사실 상 정치를 견인해왔기 때문에 주로 당시 일본 언론 주변에서 탄생한 새로운 용어라 알려져 왔다.[2] "원훈제로"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3]
최초로 원훈 대우의 조칙을 받은 정치가는 이토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4] 당초 이토 히로부미가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하자 메이지 천황이 조칙을 내린 것이었지만 삿초번벌 내 사쓰마 쪽이 불리했기 때문에 형평성을 위해 구로다 기요타카도 지명되었다. 이 시점에서는 "원훈"이라 불린 경우가 많았으며 당시 언론은 그들을 엮어 "원훈 회의"라고 보도했다. 이후 "원훈"과 "원로"라는 용어가 뒤섞이게 되었다.[5]
제1차 가쓰라 내각 이후 원훈이나 원로가 총리대신이 된 경우는 없었으며, "원훈" 대신 "원로"라는 호칭이 통례가 되었다.[6] 세월이 흐르면서 원로의 수는 줄어들어갔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후 원로 직위 소유자는 사이온지 긴모치만 남자 정계에서는 원로를 다시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 마쓰가타도 생전에 "새로운 원로의 보충이 필요함"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원로였던 사이온지는 야마모토 곤베에나 기요우라 게이고 등 유력한 후보들의 원로 호칭 수여에 난색을 표하였고, 또 별도로 중신회의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결국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1940년 사이온지의 사망을 끝으로 원로제도는 소멸했다.
↑《메이지 천황기》 1889년 11월 1일조에 "명하시니, 추밀원 문관 백작 구로다 기요타카·궁중 고문관 백작 이토 히로부미에 특히 대신의 예우를 하사하여, 원훈 대후의 뜻을 밝히셨다. O관보"(일본어: 勅して、枢密顧問官伯爵黒田清隆・宮中顧問官伯爵伊藤博文に特に大臣の礼遇を賜ひ、元勲優遇の意を昭かにしたまふ、○官報)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