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유엔기념공원(在韓UN紀念公園, 영어: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또는 줄여서 UN기념공원은 대한민국부산광역시남구에 있는 유엔군묘지이다. 1951년에 만들어졌으며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기념묘지[1]로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이 공원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전사자가 안장된 곳으로, 유엔에서 직접 관리했던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이며 성지이다. 미국, 영국, 터키 등의 전사자 2,300명이 잠들어 있으며,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정문과 추모관이 있다. 정문은 한국의 전통적 조형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고, 추모관은 참전 16국의 의미를 담아 내부를 디자인하였으며, 외형은 다국적‧다종교관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였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상징물로 의미가 크다.[2]
한국 전쟁이 시작됐을 때,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육군 영현부대는 일본요코하마시에 주둔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종됐던 미국 항공병들의 유해를 찾고 있던 제108영현등록소대(108th Graves Registration Platoon)였다.[8][9] 제108영현등록소대는 114영현등록중대(114th Graves Registration Company)로 재편됐고 흥남과 평양 등지로 파견돼 임시 묘지를 세웠다.[8] 제2병참중대 영현등록과(2nd Quartermaster Company Graves Registration Section)는 미국 제2보병사단을 지원하며 미군과 유엔군의 유해를 봉환했고, 나중에는 제148영현등록중대로 재편됐으며[10]1950년9월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펼쳤을 때 제565영현등록중대의 한 소대가 배속됐다.[8]1951년4월부터는 제293영현등록중대도 임무를 시작했다.[8] 거친 지형과 궂은 날씨, 불발탄, 부비트랩의 위협 등으로 인해 유해를 봉환하기는 어려웠다.[11][12]
유엔군 묘지의 조성
1951년1월 23일 제114영현등록중대 소속 상등병이 대구시의 유엔군 묘지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의 정보를 서류에 적고 있다. 십자가와 무명용사용 삼각형 표식, 전사자와 함께 묻는 서류가 담긴 작은 병이 함께 놓여져 있다.1951년4월부산시의 유엔군 묘지에서 한 한국인 소녀가 꽃을 헌화하고 있으며 의장대 군인 두 명이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55년11월 7일대한민국 국회에서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유엔에 건의했고,[13]12월 15일유엔 총회 결의 제977(X)호가 통과돼 묘지를 유엔 기념 묘지(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로 공식적으로 조성하고,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며 토지에 불가침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했다.[13][20]한국 전쟁이 끝난 뒤 유엔 기념 묘지는 유엔의 기금으로 운영됐으나 중화인민공화국 및 소련 측이 이를 거부했다.[21][22]1959년11월 6일대한민국과 유엔 사이에 "유엔 기념 묘지 설치 및 관리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간의 협정”을 체결했으며,[13]1974년에 유엔은 유엔기념묘지의 관리를 유해가 묻힌 11개국으로 이루어진 유엔기념묘지 국제관리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CUNMCK)로 이관했다.[13][23]
유엔기념공원으로의 변경
재한유엔기념묘지에서 영문명칭은 그대로이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2001년3월 30일한국어 명칭을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변경하였다.[13]
1950년6월 25일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1950년6월 28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이라는 이름으로 유엔군을 파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전투병력과 장비 등을 지원한 전투지원 16개국과 병원선, 의료진, 의약품 등을 지원한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과 물자지원 의사를 표명한 44개국 등을 포함하여 총 63개국이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영국군 889명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은 숨진 곳에 묻는 영국 풍습에 따른 것이다.[28]
단, 안장자 모두가 전사자는 아니다. 미군의 경우 한국 전쟁 참전자 본인이 원한 경우 사후 이곳에 안장하였다. 또한 다른 나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 병력을 철수한 게 아니라 몇 년 더 대한민국에 머물렀는데 이 머무르는 도중에 사고를 당해 죽은 경우도 이곳에 안장한 경우도 있다.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는 추모공원의 중반부에 해당하며, 전반부에서 묘역을 지나 공원으로 진입하는 주동선에 있고, 기본계획은 임채운, 실시설계는 조민석이 했다. 방문객은 정돈된 잔디를 가로지르는 좁고 긴 진입축을 통하여 숙연한 마음자세를 가다듬으며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반사 연못까지 올라온 방문객은 원형 마루판으로 돌아서 높은 곳으로 올라서면 주변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벽은 반사 연못 안에 핀 연꽃과 전사자의 철모를 형상화한 조각이 현재의 푸른 하늘과 전쟁의 참혹함, 그들의 희생정신이 평화를 가져왔음을 상징한다. 반사 연못 안에 있는 기둥 위에 꺼지지 않는 불꽃은 그들의 명예와 희생,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상징한다. 제단 뒤에 5미터 높이의 침묵의 벽이 전체 시설물의 배경 역할을 하여 내부 공간이 망자들의 공간임을 강조한다.
2,874제곱미터의 대지에 추모명비 조형물 820.60제곱미터, 보행로 부분 209.56제곱미터, 조경 부분 1,843.86제곱미터로 되어 있다.[38]
정문은 1966년11월 30일 만들어졌다. 지붕을 받치는 8개의 기둥의 끝을 순간과 영원을 상징하는 사발형태(주두)로 디자인하여 전몰장병들을 위한 부드럽고 엄숙한 기립을 표현했다. 지붕의 네 모서리 끝 추녀는 머나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지붕아래 네 개의 물받이는 전몰장병의 눈물을, 유리로 마무리된 지붕 천창은 유엔군의 영혼의 빛을 나타낸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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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 땅에서 평화를 위하여 싸우다 간 여러 나라들의 천사들에게 두 손 모아 경건히 바친 작품이다. (중략) 이 소품은 한것 부푼 선에 부드러움을 불어 넣어, 어린 시절의 아스라한 향수를 기억하면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으려는 벅찬 작업의 소산이다. 유엔 관계 건축 가운데서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우 딴유엔 사무총장의 찬사를 들은 작가로서는 큰 기쁨인 동시에 작가 개인에게도 소중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 전쟁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4년8월 21일유엔이 추모관을 건립했다. 이건물을 지탱하는 여섯 개의 노출된 들보와 추상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기하학적인 삼각 형태그 주요 특징으로 추모관 양쪽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각각 평화의 사도, 승화, 전쟁의 참상, 사랑과 평화 등의 의미를 가지며, 내부에는 전투지원 참전 16개국을 뜻하는 16의 선이 중앙 정면 바닥에서부터 유엔 상징을 통과하여 하늘로 승화한 뜻으로 천장을 가로지르는 형태에서, 전쟁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의지를 담은 추모공간으로 엄숙함을 부각시키고 있다.[28]
기념관
기념관은 1968년 건축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의 사진 자료 및 기념물이 전시되고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실무대표들로 구성된 실무회의(Sub-Committee Meeting of the Commission for the UNMCK)가 열리며, 10월 24일유엔의 날을 전후하여 각국의 주한 대사들로 이루어진 정기총회(Regular Meeting of the Commission for the UNMCK)가 열린다.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 의장국과 의장은 위원국별 알파벳 순서로 매년 임명되며, 기간은 당해년도 11월 1일부터 익년 10월 31일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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