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소년부를 졸업한 그는 프로 무대에서 데뷔한 이래 은퇴하기 전까지 라 리가에서의 8년동안 166경기 출전 95골을 기록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3개의 구단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보냈다. 그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일원으로 2번의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1962년, 아틀레티코 소속으로 100골 이상 득점한 그는 1962-63 시즌 처음 3경기에서만 무려 6골을 퍼부었다. 그 후, 페이로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토리노로 이적하여, 루이스 수아레스에 이어 두 번째로 세리에 A 무대에 발을 들인 스페인 선수가 되었는데, 수아레스와는 나중에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동행하여 1964-65 시즌에 엘레니오 에레라의 휘하에서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위대한 인테르의 일원이 되었다.[2]리버풀과의 준결승전에서 안필드 1차전 원정 경기에서 1-3으로 패한 후 2차전 안방에서 3-0 승리를 선사한 경기에 득점을 올렸다.[3]
페이로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로마로 그는 이곳에서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구단의 주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4][5]
국가대표팀 경력
페이로는 10년에 걸쳐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12번 출전하였고, 5골을 넣었다. 그는 칠레에서 열린 1962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1-0 결승골을 기록했고, 잉글랜드에서 열린 1966년 FIFA 월드컵에도 참가하였다. 스페인은 두 대회에서 모두 조별 리그를 넘지 못하고 조기에 탈락하였다.[6]
1956년 6월 3일, 페이로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1-3으로 패한 리스본에서의 포르투갈과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다.
페이로는 1978년부터 감독일을 시작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맡은 선수단은 아틀레티코의 2군으로 2년 뒤에 세군다 디비시온 승격을 이끌었다. 이후, 그는 몇몇 2부 및 3부 리그의 구단 지휘봉을 잡았는데, 그라나다를 이끌고는 2부 승격에 성공했다.
1989-90 시즌, 페이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이끈 세 명의 감독들 중 하나였는데, 당시 구단 회장이었던 헤수스 힐이 책임을 감독에게 전가하였기 때문이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상위 4개 구단에 들지 못했다.[8] 그는 2부 리그에서의 감독일을 계속했는데, 몇 차례 감독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