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유씨
소의 유씨(昭儀 劉氏, ? ~ 1707년 음력 4월 8일[1])는 조선 숙종의 후궁이다. 생애생년은 명확하지 않으며, 본관은 강릉, 성은 유이다[2].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후궁이며, 품계는 정2품 소의에 이르렀다. 1698년(숙종 24년) 음력 8월 2일 궁인으로 있다가 종4품 숙원에 책봉되었다. 당시 유씨를 후궁에 책봉하면서 그 땅과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 6,000냥과 콩 100석 등 막대한 재물이 소요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국고가 거덜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함에도 후궁의 책봉에 이처럼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식자들이 한탄하고 근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 1699년(숙종 25년) 숙안공주가 숙종에게 절수받은 전장의 백성들에게서 마구잡이로 혹독한 세금을 거두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질 때 그녀도 함께 언급되었지만 숙종의 비호를 받았다.[4] 1699년(숙종 25년) 음력 10월 23일 단종의 복위를 맞이하여 종2품 숙의로 진봉되고[5], 1702년(숙종 28년) 음력 10월 13일 인원왕후의 책봉을 기념하는 의식[주석 1]으로 음력 10월 18일 정2품 소의로 진봉되었다[6]. 1707년(숙종 33년) 음력 4월 8일 사망하여[1] 음력 6월 10일 장사지냈다. 내명부 정2품 소의에 불과하였지만 숙종의 의지로 의빈부 3등의 예로 예장[주석 2]되었다.[7] 제사를 모실 자녀와 가까운 친속이 없어 앞서 숙종에게 받은 사제에 신주를 두고 노비(환관과 궁녀)의 봉공을 받다가, 정조 즉위 직후 시행한 왕실의 사치 폐단 근절 정책 중 일환으로 이미 죽은 선왕의 공주와 후궁들에게 이속된 전답과 노비 등이 국고로 회수되면서 그녀의 신주도 수진궁[주석 3]으로 옮겨졌다[8]. 유씨 사망 직후인 1707년(숙종 33년) 음력 8월 29일 가뭄 때 제사를 올리는 성역인 삼각산의 북쪽 산기슭을 개인 시장[9]으로 절수받아 나무를 베어온 행태에 대한 사헌부의 탄핵으로 혁파되었다[10]. 현재 유씨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西三陵) 경내에 있는 후궁 묘역에 있으며, 묘표는 1767년(영조 43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경기도 양주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영토 개발을 이유로 왕자, 왕녀, 후궁의 무덤을 각각 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옮겨졌다. 1970년 5월 26일 서삼릉이 사적 제200호로 지정될 때 후궁묘도 함께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2]. 가족 관계
기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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