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가문의 배경이 인경왕후가 왕세자빈에 책봉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당시 예송으로 남인의 기세를 제압한 서인은 '물실국혼'을 앞세워 왕비는 서인 가문에서 배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론의 하나로 삼았고, 이로 인해 인경왕후 사후 송준길의 외손녀인 인현왕후 민씨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세자빈 및 왕비 책봉
1671년(현종 12년) 3월 22일,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1] 이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됐으며, 관행에 따라 현종의 국상을 마친 후인 숙종 2년에 책비례를 올렸다.[2]1677년(숙종 3년), 숙종의 적장녀를 낳았으나 다음해 요절하였으며[3], 1679년(숙종 5년) 적차녀 낳았으나 하루만에 요절하였다.[4]
사망
1680년(숙종 6년) 10월 26일, 천연두를 앓은지 8일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인경(仁敬)이며, ‘인덕(仁德)을 베풀고 정의를 행하였으며 자나깨나 항상 조심하고 가다듬는다.’ 는 뜻이다.[5]
능호는 익릉(翼陵)이며 서오릉을 구성하는 왕릉 중 하나로 경기도고양시덕양구에 있다. 1970년5월 26일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능묘이므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6] 전호(殿號)는 영소(永昭)이다.
↑승정원일기 277책 (탈초본 14책) 숙종 6년 7월 22일 기유 4/10 기사 중 "中殿累日未寧之餘, 遽有小産之候 (중략) 再啓曰, 卽仍醫女所傳, 伏聞中殿小産之後"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 7월 24일 신해 3번째기사 중 ""대내(大內)에 요즈음 재이(災異)가 있으니, 【밖에서는 무슨 재앙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혹자는 귀신의 변고가 있었다고 하며, 그때 내전에 여러 달 동안 포태(抱胎)의 징후가 있었는데, 갑자기 침전에서 도깨비를 보고 그로 인하여 놀란 나머지 하혈하고 낙태한 사고라고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