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부사카이시미나미구 출신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오사카 센보쿠 보이즈’라는 연식 야구팀에서 투수를 맡아 최고 속도 142km/h를 기록했다. 3학년 때에는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고 신장은 초등학교 졸업 당시에 180.2cm, 중학교 졸업시에는 194cm였다고 한다.[1]
중학교 졸업 후 오사카도인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가 2학년 봄부터는 에이스가 되었다. 3학년 때인 춘계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사상 최초로 전체 5경기에서 150km/h이상을 측정하여 우승을 이끌었고[2][3]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준결승전인 메이토쿠기주쿠 고등학교를 상대로 9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 8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결승전에서는 고세이가쿠인 고등학교를 상대로 9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는데 결승전 사상 최다 타이 기록인 14개의 탈삼진, 결승전 사상 가장 빠른 속도가 되는 153km/h를 기록하는 등의 투구를 보여 팀 승리에 기여해 오사카도인 고등학교는 역대 7번째 학교로 춘계와 하계 대회의 연패를 달성했다.[4] 준결승, 결승의 연속 완봉은 실로 20년 만의 쾌거였으며[5] 고시엔 대회에서의 통산 성적은 76이닝, 평균 자책점 1.07, 9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6]
가을에는 대한민국서울에서 열리는 제25회 AAA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는데 대회에서는 2차 라운드의 3연투를 포함한 합계 4경기에서 24와 1/3이닝을 던져 평균 자책점 1.11의 성적을 남기는 등 베스트 나인에 해당되는 ‘올스타팀’에 선출되었다.[7] 더욱이 이 대회에서의 활약 등으로 나중에 국제 야구 연맹이 선정하는 2012년 18세 이하 남자 연간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8] 10월 기후 국민 체육 대회에서도 우승(일정 순연때문에 센다이이쿠에이 고등학교와 동시 우승)하여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거느린 요코하마 고등학교 이래가 되는 역대 3번째 학교로 ‘3관왕’을 달성했다.[9]
2012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한신 타이거스, 오릭스 버펄로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지바 롯데 마린스 등의 4개 구단으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는데 추첨 결과 한신이 교섭권을 획득했다.[10] 당시 한신의 스카우트 담당은 하타야마 슌지였다.[11] 드래프트 다음날인 10월 26일에 한신 구단 나카무라 가쓰히로 총감독, 와다 유타카 감독으로부터 직접 지명 인사를 받았을 때 “타도 요미우리의 의미를 담아(예전에 ‘요미우리 킬러’라고 불린 고바야시 시게루[주 1] 가 착용했던) 등번호 19번을 착용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여 등번호 ‘19’번이 제시되었고[12] 11월 15일에 계약금 1억 엔+성과급 지급 5,000만 엔, 연봉 1,500만 엔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13]
프로 입단 후
2013년
3월 31일에 열린 야쿠르트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프로 첫 등판 겸 첫 선발로 나서[14][15] 6이닝 동안 3피안타, 2실점(1자책점), 7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팀 타선도 무득점에 그치는 바람에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드래프트 제도가 시행된 이후로 고졸 신인이 개막 3경기째에서의 선발 등판한 사례는 개막 4경기째에 선발로 나왔던 마쓰자카 다이스케, 와쿠이 히데아키(모두 세이부 소속)를 추월한 기록이었다.[16] 4월 7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도 본래는 선발로 나설 예정이었으나 비 때문에 전날 선발 예정이던 이와타 미노루가 슬라이드 선발 등판함에 따라[17] 처음으로 구원 등판을 경험했다.[18] 두 번째의 선발 등판이 된 4월 14일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6이닝을 5피안타, 4개의 탈삼진 등 무실점으로 막아내 프로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19][20][21][22] 4월에는 1962년 오자키 유키오[주 2]와 맞먹는 고졸 신인으로서의 사상 최다 타이 기록인 3승을 올려 드래프트제 도입 이후로는 사상 첫 기록이 되었다.[23][24]
5월 11일에는 등이 뭉치는 증상 때문에 등록이 말소됐으나[25] 복귀 후인 5월 26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고교 3학년 때 선발 야구 대회 이래가 되는 오타니 쇼헤이와의 맞대결이 성사되었다.[26][27] 이 경기에서는 콜라보레이션 상품이 발매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28] 5월 말에 4승째를 올린 이후 한 달가량 승리에서 멀어지고 있다가[29] 그 후 회복돼 7월 14일에 열린 요코하마 DeNA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시즌 6승째를 올렸다.[30] 드래프트 제도 시행 이후로 고졸 신인이 올스타전을 앞두고 6승을 거둔 사례는 2007년의 다나카 마사히로(7승,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이후 역대 5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1967년에 에나쓰 유타카(7승, 한신) 이후 역대 3번째이다.[30]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여[31] 2차전에서 올스타전에 첫 등판하였는데 오사카도인 고등학교의 선배인 나카타 쇼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같은 고등학교의 선배이자 팀 동료인 니시오카 쓰요시와 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의 지시로 포물선을 그리는 느린 공을 2개 연속으로 던지기도 했지만 2이닝을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32][33] 8월 11일의 주니치 드래곤스전(나고야 돔)에서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9이닝을 던지는 등 2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둬 센트럴 리그에서는 1967년의 에나쓰 유타카 이후의 쾌거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34] 고졸 신인이 센트럴 리그 5개 구단으로부터 승리를 거뒀다.[35] 또한 8월 31일의 히로시마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6이닝 동안 1실점을 내주며 승리 투수가 되어 시즌 10승을 올렸다.[36] 센트럴 리그에서 고졸 신인이 시즌 10승을 거둔 것은 1967년 에나쓰 유타카 이후 47년 만의 일이며, 역대 5번째의 기록이다.[36]
또한 8월에는 4승과 평균 자책점 1.09를 기록하여 월간 MVP에 선정되었는데[37][38][39] 고졸 신인이 월간 MVP를 수상한 것은 센트럴 리그에서는 1987년 8월의 콘도 신이치(당시 주니치) 이후 역대 두 번째의 쾌거였다.[38][39] 또한 후지나미가 월간 MVP를 수상함으로써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가 5월부터 월간 MVP를 4개월 연속[주 3]으로 수상하게 됐다.[37][39] 같은 구단의 투수가 월간 MVP를 4개월 연속으로 수상하기는 같은 기간 동안 4개월 연속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던 다나카 마사히로(라쿠텐, 퍼시픽 리그 투수)와 함께 사상 첫 진기록을 세웠다.[39]
그러나 공식전에서는 9월 이후 승점을 추가하지 못했고 팀 방침에 따라 투구수 제한되는 등으로 인해[40][41] 투구 이닝도 규정 투구 이닝(144이닝)에 6과 1/3이닝이 미달되었다. 그래도 센트럴 리그에서 고졸 신인으로서는 1967년 에나쓰 유타카 이래 46년 만에 5번째로 10승의 올리는 주인공이 되었고 일본 시리즈 후에 실시된 기자단 투표에서 후지나미가 신인왕으로 선정되지 못했을 경우는 ‘신인 특별상’을 수여하겠다는 발표가 나오기도 했다.[42]
팀이 정규 시즌 2위에 의해서 진출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시즌 중 히로시마와의 맞대결 성적이 2전 2승(평균 자책점 0.75)이었다는 이유로 10월 12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와의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의 선발로 발탁되었다. 일본 프로 야구 포스트 시즌에서 1차전의 선발로 나선 고졸 신인 투수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를 통틀어 이 경기에서의 후지나미가 처음이다.[43]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3이닝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는데도 5이닝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44]
플레이 스타일
“나니와의 다르빗슈”로 불렸으며[45] 197cm의 장신에서 뻗어 나오는 최고 속도 164km/h[46]의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컷 패스트볼을 무기로 삼으면서 포크볼과 커브도 정교하게 구사한다.[1] 직구를 던질 때는 움직임이 있었고[47] 투구폼은 스리쿼터였는데 공에 각도를 주기보다는 타자와의 거리의 가까움을 의식한다고 한다.[1]
좋은 투수의 조건으로 우수한 수정 능력을 꼽는다.[48] 또, 구속보다 구질을 중시하며[49] “직구 하나로 막아내는 것이 궁극의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달성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기 때는 승리에 집착하는 피칭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50]
모교인 오사카도인 고등학교의 니시타니 고이치 감독은 후지나미를 “다르빗슈에 버금가는 재주를 갖추지는 않았다. 후지나미는 거친 맛이 남아있는 투수다. 그렇지만 이 거칠음이 그의 투수로서의 장점 중 하나”[51], “다르빗슈보다는 리치 게일(전 한신 투수)하고 닮았다”라고 평가했다.[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