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 야구의 올스타전, 또는 올스타 게임(일본어: オールスターゲーム)은 일본 야구 기구가 주최하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의 각 선발팀에 의한 대항 경기이다. 현재 정식 대회명은 마이나비 올스타 게임(マイナビオールスターゲーム)이며 통칭은 ‘올스타’(オールスター) 또는 ‘구연’(일본어: 球宴 큐우엔[*])이다.
개요
매년 7월에 개최하여 감독 추천이나 프로 야구 팬에 의한 투표 등에서 선발된 선수가 출전한다.
올스타전의 원천은 단일 리그 시절인 1937년부터 메이저 리그를 본보기로 개최된 ‘직업 야구 동서 대항전’이다. 이때 당시에는 연고지별로 배분한 동서 올스타로 팀을 나누어 개최하였으며 또한 개최 시기는 시즌이 끝난 후였다. 이후 1950년에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라는 양대 리그가 출범하게 되면서 이듬해인 1951년부터 양대 리그의 대항 방식으로 치르고 있다. 시즌 종료 후엔 일본 시리즈가 진행되므로 개최 시기도 여름에, 그것도 시즌 중간에 끼어드는 형식으로 개최됐다.
대회명
1988년부터 스폰서가 주관하는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변천을 이루고 있다.
1988년~2006년: 산요 올스타 게임(サンヨーオールスターゲーム) - 산요 전기(전기·전자 기기 회사이며 현재는 파나소닉의 자회사)
2008년~2016년: 마쓰다 올스타 게임(マツダオールスターゲーム) - 마쓰다(자동차 회사,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 최대 주주)
2017년~현재: 마이나비 올스타 게임(マイナビオールスターゲーム) - 마이나비(인재 광고 기업)
개최 배경
개최 구장 및 주최 구단
12개 구단에게 차례로 개최권이 주어지면서 기본적으로 그 구단의 연고지(전용 구장)에서 열리게 되지만 지방에서 개최하는 경우에는 일본 야구 기구가 직접 개최권을 갖고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의 어느 쪽을 홈으로 하며 어떤 구단이 운영 요원을 파견하는가 하는 것은 그때까지의 개최 실적을 바탕으로 결정된다.
또한 이전에는 야간 경기가 가능한 조명 설비를 가진 수용 인원 3만 명 이상의 야구장에서의 개최가 의무화 돼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긴테쓰 버펄로스가 후지이데라 구장과 닛폰 생명 구장을 연고지로 하고 있었던 무렵 후지이데라 구장은 당시 조명 설비가 없고 닛폰 생명 구장은 수용 인원 2만 명이 넘는 규정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긴테쓰 주관으로는 열리지 않고 원래 긴테쓰 주관이 되는 순번인 1959년, 1967년, 1973년, 1979년에는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인 오사카 구장으로 대체한 후 난카이에게 개최권을 양도해서 열리게 됐다.
또한 도에이 플라이어스가 1953년부터 1961년 사이에 고마자와 야구장을 프랜차이즈로 하고 있던 9년 간 도에이의 주관 경기와 롯데 오리온스가 1973년부터 1977년 사이에 미야기 구장을 프랜차이즈로 하고 있던 5년 간 롯데의 주관 경기는 개최되지 않았다. 이유는 고마자와 야구장과 미야기 구장의 수용 능력이 앞에서 말한 3만 명 이상 수용 규정에 미치지 못했던 것과 주변 시설의 문제에 따른다. 더욱이 2002년 대회인 2차전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개최권을 가질 차례였지만 경기가 열린 것은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아닌 마쓰야마 주오 공원 야구장(봇짱 스타디움)이며 지방 개최이기 때문에 히로시마 구단이 아닌 일본 야구 기구가 주최하여 운영 요원은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센트럴 리그 각 구단에서 파견됐다.
시기·일정
초창기에는 연도에 따라 2경기와 3경기로 편차가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3경기로 정착해 왔다. MLB 올스타전이 연 1경기인데 비해 일본의 3경기는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측에서의 요구도 있어 1989년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2경기가 됐다. 다만 기본적으로 하계 올림픽 개최 연도에 대해서는 3경기를 유지한 것에 더해 3차전을 지방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 1992년에 미야기 구장을 시작으로 지방에서 열리게 됐다. 2001년을 마지막으로 3경기제는 원칙적으로 일단 없어지고 2002년 ~ 2010년에는 2경기제로 완전하게 치르고 격년으로 2경기 중 1경기(원칙은 2차전)를 지방에서 열리게 됐다. 그러나 2011년에는 선수 연금의 재원 확보 등 일본 프로 야구의 수익 강화를 목적으로 해서 10년 만에 3경기제가 부활하고[1][2] 2012년과 2013년에는 3경기제로 치렀다. 2014년부터는 다시 2경기제로 부활했고 2018년부터는 4년에 한 번, 한 경기를 지방 구장에서 개최하게 된다.[3]
경기 개최일도 초기인 1951년 ~ 1957년에는 7월 초순이나 중순에 개최됐지만 장마와 겹쳐지면서 우천 취소 또는 연기가 오래 끌었던 경우(1953년 등)도 있었기 때문에 1958년 ~ 2001년에는 장마가 끝난 이후나 여름 휴가(또는 여름 방학)가 시작되는 주말인 7월 하순에 열렸다. 1차전은 토요일, 2차전은 일요일, 이동일을 끼고 3차전은 화요일에 개최됐다. 1990년대의 2경기제는 평일 개최(1차전은 화요일, 2차전은 수요일)였다. 그 후 여름 휴가의 공식전 개최를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2002년 ~ 2004년에는 일단 7월 중순으로 일정을 앞당겼지만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시작에 의한 동일 리그 소속 팀간의 대전, 혹은 교류전의 우천 취소·연기분의 예비일 일정 확보의 관점에서 2005년 이후에는 7월 하순에 돌아온다. 1차전이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시작하는 시즌도 있었고 2011년에는 3경기 연속으로 개최됐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감염 확산의 영향으로 공식전 개막이 6월 이후로 미뤄졌기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올스타전이 취소됐다.[4]
지방 개최
위에서 말한 대로 올스타전은 일본 프로 야구 12개 구단의 연고지가 아닌 지방 도시에서도 개최된다. 일본 야구 기구에서는 올스타전 유치 조건에 대해 ‘프로 야구를 개최할 만한 시설을 구비하고 프로 야구 공식전 등의 개최 실적을 쌓으면서 시설 운영의 노하우를 키우는 것이 전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지방 개최의 경우 개최권은 일본 야구 기구에 있다. 주관하는 해당 구단이 연고지에서 개최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운영 요원 등을 파견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주관 구단은 아니다.
니가타는 2004년 4월 단계에서 2008년 올스타전 개최 도시로 내정됐으나 그해 니가타현에서 2004년 7월 니가타·후쿠시마 호우 피해(7·13 수해)와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 등의 자연 재해가 잇달아 발생했다. 이에 니가타현은 재해 복구를 최우선시하고자 2008년에 준공 예정이었던 현립 야구장 건설 사업을 동결하고 2005년 7월에 개최를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달 말에 일본 야구 기구에 개최 포기 신청서를 제출했고 8월 1일에 소집된 실행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얻어 사상 최초로 올스타전의 지방 개최를 포기한 사례로 기록됐다.[주 6] 그 후 2006년 야구장 건설의 전망이 나온 것을 계기로 다시 개최지 후보로 출마해 2010년에 도시로 내정됐고 2009년 6월에 열린 실행위원회에서 정식으로 개최 결정이 내려졌다(경기 내용에 관한 것은 2010년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을 참조).
2013년 이후, 지방 구장에서의 올스타전 개최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지만 2018년 2차전은 구마모토현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에서 개최하게 됐다. 2018년 이후, 지방 구장에서도 4년에 한 번 꼴로 개최한다.[3]
선출 방법
팬 투표에 의해 외야수만 상위 3명까지, 그 외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1위 선수가 선출된다. 투수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로 포지션을 나눠 각각 1위가 선출된다. 또한 2008년부터 선수간 투표가 도입돼 팬 투표와 마찬가지로 각 포지션별 1위 선수와 외야수 상위 3명이 선출된다.[5] 다음날에 발표되는 감독 추천(전년도 리그 우승 구단의 감독이 담당)과 모두 합쳐서 양팀 28명씩(총 56명)이 멤버로 등록된다.
선수의 범위는 원칙적으로 28명씩(총 56명)이지만 경기수 등을 고려해서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2010년에는 ‘플러스 원’에 의해서 29명(총 58명), 3경기제인 2011년부터 2013년까지는 ‘플러스 원’을 포함해 32명(총 64명)이 됐다.
감독은 전년도 리그 우승 구단의 감독이 맡고, 코치는 전년도 2위·3위 팀의 감독이 맡는다. 전년도 시즌 종료 후에 감독이 교체된 경우, 또는 시즌 중에 감독이 휴양하고 코치 등이 대행을 맡는 경우라도 그대로 감독(감독 대행)이 감독·코치가 된다.[주 7]
팬 투표
팬 투표는 공식 투표 엽서, 시판되고 있는 우편·사제 엽서, 인터넷(PC, 휴대폰)으로 투표한다. 인터넷 투표에서는 동일 메일 주소로부터 하루 1회까지 투표가 제한된다.[주 8]
공식 투표 엽서는 공식전 개최 구장과 유명 서점 등에서 배부된다.[주 9] 공식전 구장 등 일부에는 직접 투표 가능한(우표는 필요 없음) 투표함이 마련돼 있다. 예전에는 써클 K(현: 훼미리마트)에서도 배포했었지만 2016년에 종료했다. 편의점의 투표함은 2005년에 한 번 설치를 취소했다가 2006년부터 부활했다. 이것은 2005년에 전면 시행된 개인정보의 보호에 관한 법률(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한 영향이라는 설이 있었고 2006년 이후에 개인 정보를 기재하지 않아도 되는 공식 투표 엽서가 도입됨에 따라 편의점에 투표함이 부활한 것이다.
투표 개시일로부터 대략 1주일이 경과한 때부터 마감일까지 거의 매일(토, 일요일은 제외) 도중에 경과가 발표되며 마감 후 1주일 정도를 목표로 최종 집계가 공개된다. 1986년까지는 18명(1975년 지명타자 제도 도입 후에는 19명) 연달아 기입 또는 한 명만 기입하거나 18명 연달아 기입하는 것 중 어느 한쪽을 택하는 등 투표 방식의 변화를 겪다가 1987년 이후엔 한 명 기입과 연달아 기입 중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됐고 연기 투표의 경우 19명(센트럴 리그 9명, 퍼시픽 리그 10명)까지 자유롭게 기입할 수 있게 됐다(아래 내용을 참조). 그 후 룰이 개정됨에 따라 투수에 대해서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각각 3명씩 투표가 가능하기 때문에 연달아 기입할 경우에는 23명(센트럴 리그 11명, 퍼시픽 리그 12명)까지 투표가 가능하다. 다만 각 리그별로 각 포지션당 1명(외야는 3명까지)이라는 투표 방식은 엄수하게 돼있다.
공식 투표 엽서를 통한 투표는 마크시트 방식으로 미리 후보에 오른 선수들 중에서 골라 칠하는 방식이 도입됐다. 2005년부터 팬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최다 득표 플레이어’로 시상을 하는데 시상은 출장 선수 발표 후에 소속 팀의 홈 경기 개최 구장에서 이뤄지며 인정서, 상패 등이 수여된다. 노미네이트 선수 외의 경우에는 팀, 포지션, 등번호 순으로 전부 칠해서 투표한다. 2016년의 하라구치 후미히토의 경우 T→2→9→4의 순으로 전부 칠했다.
기본적으로 팬 투표로 선출된 선수가 올스타전에 불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참했을 경우 야구 협약 제86조에 의해 해당 선수가 속하는 구단의 올스타전 종료 후의 후반기가 시작한 이후부터 10경기 선수 등록을 할 수 없다. 2006년까지 ‘현저한 부상 등에 의해 출전이 불가능하다고 커미셔너가 인정했을 경우에는 출장 등록이 가능할 때까지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어 부상에 의한 출전이 불가능할 경우 등록 정지 기간의 단축 또는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명확한 적용 기준 없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그 해에 폐지됐다. 이 제도의 적용을 받은 적이 있는 선수는 2003년 가와사키 겐지로, 2006년 후쿠도메 고스케·고쿠보 히로키 등 3명이 있는데 후쿠도메의 경우 후반기 개막 이후부터 활약한 탓에 제도가 악용됐다는 비판이 일었다(특히 후쿠도메는 2006년을 제외한 모두 선출된 연도에 출전한 적이 있어서 이 해에도 올스타전에서는 부상의 영향으로 14경기를 결장했다). 또한 2019년부터 야구 협약이 개정되면서 뇌진탕에 의한 등록 말소된 선수는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 외에도 올스타전 개최 시점에서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 중인 선수에 대해서는 말소 기간 중의 경기 수를 10경기에서 빼기로 했다.[10]
역대 팬 투표 방식
1951년, 1952년: 18명 연기 시판 중인 엽서를 사용하여 우송한 것만.
1953년: 단기(1명만) 엽서 우송한 것만.
1954년, 1955년: 단기·18명 연기중 어느 것이라도 가능(시판 엽서 우송 기타, 신문인쇄 투표 용지, 엽서크기의 그림용지라도 투표와 지참도 가능).
1956년: 엽서인 경우에는 단기·18명 연기 어느 것이라도 가능, 신문인쇄 투표 용지는 18명 연기만, 어느 것이나 우송한 것만 접수하며 소포는 사용 불가.
1957년 ~ 1970년: 엽서나 신문인쇄 투표 용지 모두 18명 연기만, 어느 것이나 우송한 것만 가능하며 소포 사용 불가.
1971년, 1972년: 양대 리그 모두 같은 수비 위치·선수를 1명씩 선택하는 준단기 방식(즉 투수를 투표하고 싶으면 센트럴·퍼시픽 각각의 투수 중에서 1명씩 선택함) 엽서, 전용 투표 용지에 의한 우송분.
1973년 ~ 1975년: 양대 리그 모두 투표자가 각자 수비 위치를 선택해 2명씩 투표하는 준단기 방식 엽서·전용 투표 용지에 의한 우송분.
1976년 ~ 1986년: 19명 연기(수비 위치와 등번호의 숫자와 구단의 영문 약칭을 병기) 엽서·전용 투표 용지에 의한 우송분.
1987년 ~ 현재: 단기·연기 어느 쪽이나 가능. 연기인 경우에는 19명(그 후 투수를 3가지로 분류했기 때문에 현재는 23명)까지의 범위라면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게돼 엽서·전용 투표 용지에 의한 우송, 구장 등에서의 직접 지참, 그 후 인터넷(PC, 휴대전화)에서의 투표도 가능하다.
※관련 출처: 《베이스볼 레코드북 1988년판》(베이스볼 매거진사), ‘올스타 게임’ 항목을 참조
현행 팬 투표의 문제점
인터넷 투표의 도입에 따라 쉽게 대량 투표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부상으로 경기 출장이 없었던 선수가 선택되거나 그 포지션을 경험한 적이 없는 선수가 표를 모은다는 불가해한 결과가 많이 보이게 됐다(예를 들자면 2003년의 가와사키 마쓰리). 호의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타격에 자신있었던 트레이 무어 투수에게 1루수로서의 투표가 들어와 있기도 하였고 일부 팬이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3루수 부문에서의 선출을 저지하기 위해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 표를 집중시키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릭 쇼트에게 거의 지킨 적이 없는 유격수로서의 표가 많이 들어있었던 적도 있다.
지명된 선수에의 투표에 비해 그 외 선수에게의 투표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명외 선수가 선출되는 것은 극히 적다. 그 때문인지 시즌 중간부터 주전이 된 선수, 지명되지 않은 선수는 선출되기 어렵다. 또한 시즌 중에 포지션 변경이 있었던 선수도 변경 전 포지션에서의 득표가 압도적으로 많다. 더욱이 포지션을 변경한 선수는 표가 각 포지션으로 분산돼 버린다(2000년대 후반 이후에서는 마쓰나카 노부히코에게 표가 1루수, 외야수, 지명타자로 분산됐다).
선발·중간 계투는 팀당 5 ~ 6명씩 있지만 범위는 각각 1개씩 밖에 없기 때문에 감독 추천이 아니면 출장은 어렵다.
표가 들어오기 쉽다는 조건만 있다면 부상 선수나 2군에서 조정 중인 선수까지 선출되는 일이 있다(2007년의 마쓰모토 아키라 등).
드물게 구단 스스로가, 혹은 구단 소재지의 현지 언론 등이 주도하는 형태로 팀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팬에게 투표를 호소한 경우 결과적으로 해당 구단 소속 선수에게의 대량 득표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 특히 그 구단의 시즌 성적이 부진한 경우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1978년의 닛폰햄, 1995년의 요코하마, 2007년의 라쿠텐 등이 있는데 특히 전자의 경우 일부 선출된 선수가 출전 포기로 몰린 적도 있다).[11]
이러한 문제의 개선책으로서 지명 제도의 폐지나 포지션별 선출의 재검토 등이 논의되고 있다. 오 사다하루(소프트뱅크 구단 회장)는 사안으로서 AKB48의 총선거와 같은 방식, 즉 관전권 1장 당 투표 용지 1장을 첨부하는 방식을 내놓았다.[12]
2008년부터 현역 선수가 팬 투표와는 별도로 투표를 실시해 출장 선수를 선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투표는 12개 구단의 지배하 등록 선수 전원에 의해 실시한다.
투표 대상 선수는 각 구단이 선출한 팬 투표 리스트의 30명이다.
센트럴 리그는 9개 포지션 9명, 퍼시픽 리그는 지명타자를 포함한 10개 포지션 10명에게 투표하며 외야수는 포지션을 나누지 않고 3명이다.
2010년까지는 자기 구단의 선수에게 투표가 불가능했으나 2011년도부터 가능해졌다.
센트럴·퍼시픽 각각의 포지션 득표수 1위를 올스타전 출장 선수로 한다.
팬 투표와 선수간 투표의 1위가 동일 선수였을 경우, 2위 선수를 위로 올리지 않고 그 범위는 감독 추천 선수에 포함시킨다.
플러스 원
2010년에 60회 대회 특별 기획으로서 도입된 팬 투표·선수간 투표·감독 추천 선수 이외로부터 ‘최후의 1명’을 결정짓는 팬 투표이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실시되지 않았으나 이후 2018년부터 재개됐다. 2021년에도 실시되지 않다가[주 10] 2022년부터 재개되고 있다.
투표 접수는 인터넷(NPB 공식 홈페이지)에서 한다. 2019년에는 트위터, 2023년에는 SmartNews 앱에 의한 투표도 가능했다.
센트럴·퍼시픽 각각의 득표수 1위를 올스타전 출장 선수로 한다.
출장 대상 선수
원칙적으로 5월 말까지 지배하에 등록된 선수를 대상으로 한다.
2004년부터 1군의 경기 실적이 없는 선수에게의 투표는 금지하고 또한 조직표 방지의 관점에서 타자는 10경기 이상, 또는 20타석 이상 출장, 투수는 5경기 이상, 또는 10이닝 이상의 등판(출장) 실적이 없는 선수는 선출 대상에서 제외하게 됐다.
외국인 선수는 팬 투표에 대해서는 추천의 상한을 두지 않는다(경기 출장 즈음에는 동시 출장의 경기에 상한이 있다).
투표 기간 중의 선수 이적에 관해서는 동일 리그 내에서의 경우는 전 소속 구단의 성적도 합하여 득표 수로 계산한다. 다른 리그에의 이적일 경우에는 전 소속 구단의 성적을 그대로 ‘이적 전’을 취급하여 남겨두고 이적처 구단의 소속 리그에서는 다시 ‘0’부터 득표를 계산해간다.
경기 방식
예고 선발이 있어 1차전은 경기 전날에 발표되며 2차전과 3차전은 경기 종료 후에 발표된다.
우천으로 경기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공식전과 마찬가지로 콜드게임은 5회말 종료 시점에 성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투수는 3이닝 이상 등판할 수 없다. 단 1사 또는 2사 후에 등판했을 경우는 이후 3이닝을 완전히 던질 수 있다(따라서 기록상으로는 최대 3과 2/3이닝까지 등판 가능하다).
허용되는 외국인 선수 범위는 팀당 최대 5명(2010년까지는 4명)이다. 동시에 출전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는 투수 1명, 야수 4명(2010년까지는 3명)까지이다.
경기의 심판은 일본 야구 기구 심판부에서 선출된 심판이 맡으며 일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6명으로 구성된다. 공식전이나 교류전과는 달리 외심으로 불리는 심판(이전의 선심, 주로 양쪽 폴대로 타구가 날아갔을 시 파울이냐 홈런이냐를 판정함)이 양쪽 날개의 파울 라인 상에 선다.
명확히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개최 구장이 연고지인 팀의 투수가 선발을 맡는 것이 관례다(야마모토 마사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언급했음). 그 예로 2003년 1차전(오사카 돔)에 센트럴 리그는 한신 타이거스(당시)의 이가와 게이, 퍼시픽 리그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당시)의 이와쿠마 히사시가 선발로 나섰다(그 해의 주관 구단은 오사카 돔을 홈구장로 사용하고 있는 긴테쓰였지만 2002년 올스타전 개최 조항 개정에 따라 2경기를 개최할 경우 홈 경기는 센트럴·퍼시픽 리그가 각기 1경기씩 맡기로 결정됐기에 센트럴 리그의 홈 경기가 됐다).
지방 구장에서 열리는 경기의 경우 그 구장의 주관 구단에 상당하는 순번의 구단(지방 개최 시에는 일본 야구 기구가 주관하므로)의 투수가 선발을 맡을 때가 많다. 그 예로 2006년 2차전(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의 경우 센트럴 리그는 미야자키를 캠프지로 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쓰미 데쓰야가, 퍼시픽 리그는 현지 규슈 지방(미야자키 시는 캠프지이기도 함)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사이토 가즈미(당시)가 선발로 나섰다.
대회 CM
1999년 대회와 2000년 대회 개최시에는 양팀 감독이 출연한 대회 오리지널 CM이 제작돼 6월 경부터 각 구장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상영됐다.
대회 마스코트 캐릭터
1990년대 산요 전기 스폰서 시절에 별을 모티브로 한 올스타전 오리지널 대회 마스코트 캐릭터 ‘우쓰이누’(うっ太)와 ‘나게이누’(なげ太)가 존재했다. 헬멧에 센트럴 리그의 로고가 쓰여진 것과 퍼시픽 리그의 로고가 씌어진 것 2개가 존재됐다.
대회 심볼 마크
산요 전기 시대: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로고가 새겨진 헬멧이다.
프랙티스 유니폼
2007년까지는 연습중에도 각 구단의 유니폼을 착용했지만 2008년부터는 센트럴·퍼시픽 리그 각각의 이미지 컬러인 연맹기의 색(센트럴 리그 = 녹색, 퍼시픽 리그 = 파란색)을 기조로 한 프랙티스 유니폼(미즈노 제공)을 착용한다. 덧붙여서 이 유니폼은 출장 선수의 직필 사인을 넣어서 인터넷 옥션에 출품한다. 자선 사업에 따른 매출금은 일본 적십자사를 통해서 그 해에 발생한 미얀마의 사이클론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쓰촨 대지진 피해 지역의 구호 활동에 충당됐다.
2009년 대회는 개최 구장을 연고지로 하는 구단의 팀 컬러(센트럴 리그 = 카프의 빨간색, 퍼시픽 리그 = 파이터스의 파란색)로 2010년 대회에는 각각의 개최지를 이미지화한 색(센트럴 리그 = 니가타의 동해에 떠오른 석양의 오렌지와 동해의 블루, 퍼시픽 리그 = 후쿠오카의 현해탄의 깊은 바다를 이미지화한 검은색과 암청색)으로 각각 변경[주 11] 되고 있다.
2011년 대회는 센트럴·퍼시픽 리그 모두 마크와 로고 외에는 모두 같은 디자인으로 했다. 이것은 그해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의 부흥을 12개 구단 하나가 되어 힘쓰고 있다는 메시지를 넣은 것으로서 일장기를 이미지화한 ‘백지에 붉은색’으로 돼있다. 2012년 대회와 2013년 대회에도 같은 디자인(로고는 변경[주 12])을 사용했다. 더욱이 실제 경기에서 착용한 유니폼은 출장 선수의 직필 사인을 넣어서 인터넷에 의한 자선 옥션에 출품됐다. 옥션의 매출 전액을 일본적십자사를 통해서 지진 재해의 부흥을 위해 사용된 바 있다.
2014년에는 3년 만에 디자인이 변경이 되면서 센트럴 리그는 ‘은’, 퍼시픽 리그는 ‘금’을 기조로 한 유니폼이 만들어졌다. 로고 주변에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개최지를 본뜬 별이, 모자에는 리그의 로고 마크가 각각 그려졌다. 또, 이듬해 2015년에도 같은 디자인을 사용했다.[주 13]
2016년에는 공급자인 마제스틱 재팬으로 변경돼 유니폼도 새로워지면서 2009년과 동일하게 개최 구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구단의 팀의 특성(센트럴 리그 = 베이스타스의 파란색, 퍼시픽 리그 = 호크스의 황색)을 모티브로 삼았다. 2017년에는 개최 구장을 홈구장로 하는 구단의 원정팀 유니폼(센트럴 리그 = 드래건스, 퍼시픽 리그 = 마린스)을 베이스로 한 디자인으로 했다. 2019년에는 센트럴 리그는 짙은 감색·초록색·짙은 청색(개최지 고시엔 구장이 있는 효고현기의 색깔), 퍼시픽 리그는 회색·파란색·에도보라색(도쿄 돔이 있는 도쿄도기의 색깔)의 각 3가지 색상을 기반으로 양 옆에 소속 구단을 이미지로 한 별이 각각 3개씩 그려진 디자인으로 구성됐다.
이 유니폼에 대해서는 제공자인 미즈노가 일반용으로 제작하고 있는 복제판을 통신 판매 등에서 판매도 하고 있다. 또한 판매는 기간을 한정해서 팬 투표 기간 중부터 개시된다.
과거의 경기 방식
연장전 규정
1953년 : 12회까지.
1954년 ~ 1955년 : 일몰까지.
1956년 ~ 1958년 : 22시 15분 이후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59년 ~ 1964년 : 22시 30분 이후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65년 ~ 1967년 : 22시 15분 이후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68년 ~ 1973년 : 22시 20분 이후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74년 : 21시 30분 이후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75년 ~ 1987년 : 경기 개시 3시간을 넘기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88년 ~ 1991년 : 경기 개시 4시간을 넘기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2회 중단.
1992년 이후 : 연장 없음, 9회 중단.
지명타자
1982년 이전 : 채택되지 않음
1983년 : 채택됐는데 퍼시픽 리그에만 도입
1984년 ~ 1989년 : 채택되지 않음
1990년 ~ 1992년 : 퍼시픽 리그 연고지 구장에만 채택
1993년 이후 : 모든 경기에 채택됨
각종 시상
최우수 선수상(각 경기에 대해 1명씩) : 상금 300만 엔
우수 선수상(각 경기에 대해 4명씩) : 상금 100만 엔
2009년도부터는 우수 선수에게 대신해 다음의 각 상을 증정.
베스트 배터상(가장 뛰어난 타격 기술을 보인 선수) : 상금 100만 엔
베스트 피처상(가장 탁월한 투구를 보인 선수) : 상금 100만 엔
베스트 플레이상(수비·주루 등 여러 가지 플레이로 ‘이것이야말로 프로’라는 기술을 보인 선수) : 상금 100만 엔
※6 : 3대 3으로 맞이한 연장 12회말 무사 1·3루, 타순은 투수 나카야마 히로아키(다이요). 야수는 모두 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센트럴 리그의 오 사다하루 감독이 투수 중에서도 타격이 좋은 미즈노를 대타로 기용하여 중견수 쪽을 향해 끝내기 희생타를 때려냈다. 같은 이유로 1980년 7월 22일의 3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2대 1로 맞이한 9회초 퍼시픽 리그의 공격 2사 만루 상황에서 마쓰누마 히로히사(세이부)의 대타에 퍼시픽 리그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당시 긴테쓰 감독)이 야마우치 신이치(난카이)를 내보낸 적이 있었지만 센트럴 리그의 마무리 투수인 에나쓰 유타카(히로시마)에게서 삼진으로 물러났다.[주 19]
※7 : 신인으로서의 달성(사상 최초)
※8 : 3번 브랜던 레어드에게 1, 3, 4구째(결과는 각각 스트라이크, 파울, 헛스윙 삼진)와 4번 시마우치 히로아키에게 1구째(중전 안타)에서의 총 4구로 기록.
텔레비전·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중계·전송
현재는 일본 내에서만 지상파 방송과 위성방송 모두 민영 방송이 중계하고 있다. NHK에서도 이전에는 텔레비전·라디오 양쪽 모두에서 방송하고 있었지만 주관 대회의 제약으로부터(주관 스폰서의 CM을 내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광고·방송 금지를 규정한 방송법 제83조에 저촉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은 1994년, 라디오는 2003년을 마지막으로 철수했다(라디오 방송으로 지역 방송을 할 수는 있다). 민방에서는 과거에 주요 4개 방송국[주 20]이 방영권을 획득하여 1989년까지는 각 계열사의 병렬 방송도 이뤄지고 있었다. 그 후 닛폰 TV는 2009년 1차전, TBS는 2011년 1차전, 후지 TV는 2013년 3차전을 끝으로 방송에서 손을 뗐고 2014년 이후에는 모든 경기가 TV 아사히 계열에서 방송하고 있다.[주 21]
올스타전이 주간 경기로 개최되면서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지방 대회가 중복되는 경우 중복된 지구에만 지방 대회 중계로 교체되는 경우가 있다.
라디오 중계
원칙적으로 개최 구장이 있는 지역의 AM 라디오 방송국이 제작하여 전국 네트워크로 중계하지만 월요일에 개최하는 경우엔 임의 네트워크 취급이 된다. 복수국이 있는 지역에서는 NRN과 비NRN(JRN)으로 분담해 제작, 중계한다.
홋카이도 개최: HBC 라디오(JRN), STV 라디오(NRN)
간토권 개최: 분카 방송(토·일요일은 NRN, 화~금요일은 비NRN), 닛폰 방송(화~금요일은 NRN, 토·일요일은 비NRN) ※월요일은 어느 쪽이 NRN 계열국과의 네트워크를 실시하는지가 수시로 다르다.
시청률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는 30%대를 기록하여 1990년대까지는 20%대를 유지했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10%대로 낮아지는 추세이며 2007년도 2차전에서는 처음으로 한 자릿수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1차전에서 처음으로 한 자릿수로 떨어졌고 2019년 이후에는 두 경기 모두 한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모두 비디오 리서치의 조사이며, 간토 지구·세대·실시간으로 나온 것이다.
세대별 평균이 높은 시청률의 경기
1978년 : 1차전(7월 22일, TBS계) 34.6%
1979년 : 1차전(7월 21일, TBS계) 34.6%, 2차전(7월 22일, TBS계) 32.9%, 3차전(7월 24일, 후지 TV계) 33.5%
1981년 : 2차전(7월 26일, TBS계) 32.8%, 3차전(7월 28일, 후지 TV계) 29.8%
1983년 : 1차전(7월 23일, 후지 TV계) 32.5%, 2차전(7월 24일, 후지 TV계) 32.5%
2009년에는 프로 야구 실행 위원회에서 “교류전이 있어서 가치가 희석되고 있다”며 올스타전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올스타전은 일본 프로 야구의 기간 수익 사업의 하나로서 매년 많은 관중을 모아서 높은 수익을 가져오고 있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이전에는 2억 엔(추정) 가까이 됐던 지상파 TV 중계의 방영권료가 근년에는 하락의 길을 걷고 있다. 또한 주관 스폰서도 산요 전기의 철수 이후 장기 계약을 희망하는 기업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이러한 요인에서 이미 수익이 한계에 도달한 측면이 있다.[17] 그 후 2008년 이후에는 마쓰다가 올스타전의 주관 스폰서를 맡았지만 2016년부로 계약이 종료됐고, 2017년부터는 마이나비가 주관 스폰서를 맡게 됐다.
드래프트 우선권
2014년까지 올스타전 결과에 의해서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 있어서의 두 번째 지명 이후의 지명 순서 우선권이 주어지고 있었다. 판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승리한 리그
승패 수가 같을 경우 득실차로 웃돈 리그
득실차가 없는 경우 추첨
실제로 2013년 올스타전에서는 1승 1무 1패·득실차가 없었기 때문에 추첨을 통해서 퍼시픽 리그가 우선권을 얻었다.[18] 2015년부터는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 승리한 리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게다가 2019년 이후에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가 격년으로 우선권을 주는 방식으로 재변경됐다).
올스타전에는 한동안 진검 승부를 ‘직구 승부’라고 곡해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투수가 직구를 많이 던지는 광경이 많이 보여서 ‘올스타전에서는 변화구를 던지기 힘들다’, ‘진정한 진검 승부를 볼 수 없다’ 등의 의견도 있었다.[19]
선발 투수에 대해서 그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구단의 투수를 선발로 하는 경향이 많고 지방 구장의 경기에서도 주관하는 구단의 투수를 선발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용 구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구단에서 선발 투수, 또는 투수가 선출되지 않는 경우에는 연고지 구단과는 관계 없는 구단 투수가 선발하는 일도 있다. 또 선출돼도 세간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투수가 선출됐을 경우에는 그 투수가 선발로 나올 수도 있고, 그러한 경우에는 중간 계투나 마무리로 돌려질 수도 있다.
각주
주해
↑2005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전용 구장이 되면서 지방 개최로 다루지 않게 됐다. 이후 2007년, 2011년, 2021년에 올스타전을 개최했다.
↑미야기현센다이시아오바구에 본사를 두고 있던 프로 야구 정규 시즌의 흥행 전문 회사인 ‘도호쿠 야구 기업’이 흥행면에서 협력했다.
↑2004년부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전용 구장이 되면서 지방 개최로 다루지 않게 됐다. 이후 2009년과 2013년에 올스타전을 개최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7년에 고바야시 세이지가 올스타전 개최 전까지 전반기 시즌에서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했는데 올스타전 2차전에서 홈런을 쳐서 다카하시 요시노부 감독(당시)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과거에 스폰서 협찬이 없었던 시절에는 자동차가 각 경기의 MVP 부상으로 증정됐던 적이 있다.
↑2011년의 경우에는 ‘앞으로 발매되는 SKYACTIV TECHNOLOGY 탑재차’로 하고 있으며, 개최시에 ‘SKYACTIV TECHNOLOGY’가 탑재돼 있었던 차는 데미오 13-SKYACTIV 뿐이었기 때문에 데미오가 상품 이미지 차량으로서 구장에 전시돼 있었다. 따라서 데미오가 상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에는 SKYACTIV TECHNOLOGY 탑재의 ‘데미오’, ‘악셀라’, ‘CX-5’ 중 1대, 2014년에는 ‘아텐자’, ‘악셀라’, ‘CX-5’ 중 1대, 2016년에는 ‘로드스터’, ‘CX-3’, ‘데미오’, ‘악셀라’, ‘아텐자’, ‘CX-5’의 등 이 가운데 1대가 증정됐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한 에나쓰는 레론 리, 아리토 미치요(모두 롯데 소속), 야마우치를 3자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고 선제타를 때려낸 마유미 아키노부와 홈런을 쳤던 가케후 마사유키(모두 한신 소속)를 모두 잡아내 MVP를 차지했다. 이것은 ‘9연속 삼진의 재현’, ‘작년 시즌의 일본 시리즈(에나쓰의 21구)의 재현’이라고 불리는 등 화제가 됐다.
↑TV 아사히에서의 방송은 자본 관계상 통상적으로 방영권을 보유하지 않은 주니치 주관분이나 방송에서 철수한 요미우리의 주관분도 포함돼 있다. 더욱이 오랫동안 마이니치 방송→아사히 방송 TV 주도로 제작하던 한신 및 오릭스 주관의 방송분도 2012년 이후에는 TV 아사히 주도에 의해서 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