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고바 다케시 감독의 희망에 의해 김기태와의 1:1 트레이드에 따라 히로시마로 이적하였다. 선발 투수로 활약하면서 2차례 15승(1978, 1980)을 기록했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1979~1980년)에도 기여하며, 카프황금기의 일익을 담당했다. 1982년에는 3승 밖에 올리지 못하고 퇴단하였다.
1983년 내야수 이영구와 함께 재일 교포 선수로는 처음으로 KBO 리그에 진출하여 1983년삼미 슈퍼스타즈에서 30승(선발 28)[1] 16패 6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KBO 리그의 단일 시즌 최다 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427⅓이닝이라는 단일 시즌 최다 이닝 투구도 기록했으며 역대 선발 20승 이상 투수 중 가장 많은 최다 탈삼진(220개)[2] 기록도 보유하고 있으며 그 해 6완봉승(롯데 2,삼성 1,해태 1,MBC 1,OB 1)으로 최다 완봉승 1위를 기록했는데 역대 선발 20승 이상 투수 최다 완봉승[3] 기록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83년에는 롯데전에서만 2완봉승을 기록한 데 이어[4][5] 첫 승(선발승)을 롯데전(4월 3일 데뷔전)에서[6], 최초 선발 20승(당시 1구원승 포함 21승)을 롯데전(7월 31일 선발승)에서[7] 기록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1억 원이라는 보너스를 둘러싸고 삼미 측과 갈등이 발생하였으며, 청보가 삼미한테서 구단을 인수하였던 1985년에는 단일 시즌 최다 패배 기록인 25패를 당하기도 했고 1983년에는 정규시즌 MVP가 유력했지만 재일동포란 이유 탓인지[8] 탈락했다. 1986년빙그레 이글스에 이적했다가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후, 1988년2월 16일부터 1년 계약 형식으로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를 맡았으며
[9] 삼미-청보 시절 인연을 맺은 김진영 감독이 1989년 11월 2일 2년 계약 형식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에 부임하자[10] 같은 달 30일부터 1년 계약으로 롯데 투수코치를 맡았다[11].
그러나, 김진영 감독은 1990년 시즌 초반 한때 상위권을 질주했지만 팀 순위 다툼이 치열해지자 당초 구상과는 달리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등판시키겠다던 박동희를 선발-마무리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투입시켰고 이 때문에 정작 승부처인 후반기 이후부터 힘을 쓰지 못하여[12] 결국 그 해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본인(장명부)도 같은 해 말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단행된 물갈이에 따라 팀을 떠났고 삼성 2군 투수코치로 재직할 당시 1군 감독이었던 박영길 감독이 1990년 시즌 뒤 태평양 돌핀스 감독에 부임하자 투수코치로 영입될 계획이었으나[13] 구단 측의 반대로 좌절됐다.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91년 5월에 박찬, 성낙수와 함께 필로폰(일명 히로뽕)을 사용한 혐의가 드러나 마약 사범으로 구속되었다가 그 해 7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 대가로 KBO 리그계에서 영구 제명됨과 동시에 대한민국에서는 영구 입국 금지 명단에 올랐다. 이후 그는 더 이상 고국으로 올 수 없었으며, SK 와이번스에서 2004년 4월 4일 문학야구장 첫 개막전에 그를 초청하려고 했으나, 일본 내에서 그의 행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초청을 포기하고 감사용으로 대체하였다.[14]2005년 4월 13일, 자신이 운영하였던 와카야마현의 한 마작 하우스에서 돌연 고독사하였다.[15] 향년 56세로, 사인은 마약중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