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고졸 우선 지명으로 입단했는데 그 해 쌍방울 레이더스에게만 3완봉승을 기록해[1][2][3] 순수 신인 단일 시즌 특정 팀 최다 완봉승 타이를 기록했다.
입단 첫 해 14승(13선발승)을 시작으로 역대 최고 기록인 1999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선발승 이상, 평균자책점 2.80, 평균 투구 이닝 188이닝으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1997년에는 포수 강인권의 실책으로 퍼펙트 게임을 아깝게 놓치며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팀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는데 같은 해 7월 23일삼성 라이온즈전에서 3실점 완투승을 거둬[4] 역대 5번째 세 자릿수 선발승 투수가 됐다. 하지만 혹사로 인해 1998년부터 구위가 현저히 저하됐고, 팔꿈치 통증이 나타나 훗날 그의 선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0년에 입단하여 2시즌을 보냈다. 국내에서는 리그 최고 수준의 에이스였지만 일본 리그에서는 현지 적응 실패와 리그 격차로 인해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일본 리그에서 그는 2시즌 동안 3승 2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고, 부진했던 주요한 원인으로는 급격한 구위 저하, 팔꿈치 통증이었다. 그렇지만 이 결과에는 여러 논란이 있는데 실제로 그의 입단 후 첫 등판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상대로 7이닝 1실점 승으로 호투했으나 경기 직후 2군행 통보를 받았고, 다시 올라온 1군 경기에서 요코하마를 상대로 9이닝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거뒀으나 이후로도 등판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 후 국내 복귀 20완봉 달성 인터뷰에서 "시스템이 참 이상했다."라고 회고했다.
친정 팀으로 돌아와 2002년 시즌부터 다시 활동했지만, 전과 같지 않은 구위로 난조를 겪었다. 2004년에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그동안 괴롭혀 왔었던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수술을 받았다.[5] 이후 재기를 다짐하며 2005년에 재기 가능성을 보였고, 2006년부터 기교파 투수로 재기에 성공해 팀의 선발로 활약했다. 2007년 12승 5패,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완벽하게 재기했다. 그러나 2008년 노쇠화로 인해 다시 부진했다. 2009년에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다가 은퇴를 선언했으며, 9월 12일 은퇴식과 영구 결번식을 치렀다.
포스트시즌 노히트 노런 : 1996년 10월 20일 현대 정명원 (한국시리즈 4차전, 인천 해태전)
최고령 기록 2000년 5월 18일 송진우 (34세 3개월 2일) 최연소 기록 1993년 4월 30일 김원형 (20세 9개월 25일) 비공식 기록 1992년 5월 13일 롯데 박동희 (사직 쌍방울전, 6회 강우콜드) 합작 노히트 노런 : 2014년 10월 6일 LG 신정락, 유원상, 신재웅 (잠실 NC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