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1968년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하루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바르샤바 조약 기구 중 4개국(소련, 폴란드 인민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헝가리 인민공화국)으로부터 침공 받은 사건을 말한다.[3] 침공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자유화 개혁인 프라하의 봄이 중단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권위주의 세력이 강화되게 만들었다. 수천 대의 탱크와 수백 대의 전투기가 지원하는 약 25만명(이후 50만명으로 증가)의 바르샤바 조약군이 작전명 다뉴브 작전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야간에 침공하였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중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군대 파병을 거부하였지만,[4][5] 동독군은 침공 몇시간 전에 소련으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을 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6] 침공 기간 동안 137명이 넘는 체코슬로바키아인이 사망하였고,[1]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2] 동구권 국가의 엇갈린 반응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인 폴란드, 불가리아는 소련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반면, 동독은 중립을 지켰고, 루마니아는 소련의 개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헝가리는 여러차례 중재를 시도했으나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자 소련의 손을 들어주고 군사행동에 가담했다. 한편 알바니아와 중국은 소련의 군사행동에 대해 사회제국주의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우호 관계인 북한과 몽골은 입장을 표명하지 않거나 말을 아꼈다. 결과알렉산데르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 직에서 탄핵되었고 이듬해 당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둡체크의 정책들은 거세게 비판받았고 온건 개혁파로 꼽히는 구스타우 후사크가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후사크는 정상화 조치를 시행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질서 정연한 사회로 신속히 이행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1971년 구스타우 후사크는 공산주의에 대한 중도적인 접근법을 제시하며 개혁파와 보수파를 모두 달랬고, 1972년에는 프라하의 봄 시위 가담자를 석방하며 정부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였다. 같이 보기각주
참고 문헌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