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전국체육대회 축구는 일제강점기 조선경성부에서 개최된 1921년 전국체육대회의 경기 종목이다.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로 개최되었으며 1921년 2월 11일부터 2월 12일까지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1][2] 당초 2월 13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1] 분규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면서 2월 12일까지만 개최되고 대회가 중단되었다.[3]
조선체육회는 대회를 앞두고 경기 규칙에 대해 강습회를 열고 선수들에게 경기 규칙서를 나눠졌지만, 경기 도중 선수간 경기 규칙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한 분규가 끊임없이 일어났다.[3] 대진표를 미리 짜지 않고 경기마다 추첨을 통해 대진을 결정하는 등 대회 운영이 미숙했고 심판에 대한 권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회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3] 이에 조선체육회는 대회 2일차인 1921년 2월 12일 경기에는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축구를 했던 서병희를 심판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했다.[3]
하지만 청년부 준결승 경기에서 서울의 배재구락부와 평양의 숭실구락부 경기 후반전 도중 오프사이드 반칙에 대한 논란으로 경기가 중단된 사이 관중간 욕설과 폭행이 오가는 난동이 발생했다.[3] 난동으로 경기를 속행할 수 없게 되자 경기는 중단되었고,[3] 중학부와 청년부 모두 우승팀을 가리지 못한채 대회가 중단되었다.[5]
대회 중단 사태의 여파로 평양YMCA가 주최하여 평양 숭실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배재 측에서 보복을 우려하여 중학부와 청년부 종목 모두 불참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