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이며 수렴청정을 한 마지막 왕비이다. 세자빈으로 입궁하여 대왕대비에 이르렀지만 남편의 요절로 인해 왕비로 등극하지 못했다. 헌종 재위기에는 친정인 풍양 조씨 일족이 국정을 주도였으며, 철종 대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조대비(趙大妃)라는 이칭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말년에는 조선의 개항과 개화 과정,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혼란한 격변기를 모두 지켜보았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장수(81세 4개월 11일)하였으며, 가장 오랜기간(32년 6개월 9일) 대왕대비로 재위하였다.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원손(헌종)을 낳았다.[3] 그러나 1830년(순조 30년) 5월, 남편인 효명세자가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 같은해 9월, 아들 헌종이 왕세손에 책봉되었다.[4]
왕대비 시절
1834년(순조 34년), 순조가 승하하고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다. 세자빈 조씨는 왕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대비가 되었다. 1836년(헌종 2년),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5] 헌종 시기, 시가인 안동 김씨와 친정인 풍양 조씨 두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자행되었다.
1847년(헌종 13년), 40세를 맞이하여 창덕궁인정전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이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6]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정조의 직계혈통이 단절되자, 순원왕후는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전계군(全溪君)의 아들인 덕완군 원범을 철종으로 옹립하였다.
1863년(철종 14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4촌인 익평군의 아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로 압축되었다. 흥선군은 신정왕후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7]
고종의 즉위와 수렴청정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載晃, 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8] 고종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대왕대비이자 고종의 법적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고종의 친부인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신정왕후는 중앙과 지방에 다음과 같이 유시하여 방계 혈통인 고종의 정통성을 천명하였다.[9]
“
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만일 나라를 전한 계통을 논한다면 정조 · 순조 · 익종 · 헌종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철종)에 이르고 주상께서 이어받았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첩이 낳은 자녀를 서얼이라 하였는데, 첩의 신분이 양인이면 그 자식은 서자라고 하였고, 첩의 신분이 천민이면 그 자식은 얼자라고 하여 첩의 신분에 따라서 자식들을 또다시 구별하였다. 서자와 얼자를 합쳐 서얼이라고 칭한다. 태종은 서얼 금고령을 내려 서얼의 관직 진출을 제한했으며, 성종 대에 반포된 《경국대전》에 의해 성문화되었다.
서얼들은 이후 수백년간 조정에 관직의 진출을 요구하는 허통 운동을 벌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의 요구가 조금씩 받아들여졌다. 영조, 정조, 순조는 윤음과 절목을 내려 이들의 관직 진출 제한을 완화하고 서얼의 허통 범위를 확대하였다. 1851년(철종 2년), 서얼의 청요직 진출을 허용하고 문과 합격자에 대한 서얼 차별을 폐지하는 신해허통이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서얼과 중인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인식이 남아있었다.
1864년(고종 2년), 신정왕후는 전교를 내려 서얼의 허통을 분부하였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자들의 관직 제한이 완화되었다.[10] 서얼과 중인들의 고위 관직 진출이 완전하게 허용된 것은 1882년(고종 20년)이며,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신분에 관계 없이 관직 진출이 허용되었다.
내가 미망인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 나도 종묘 사직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주상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 성상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 처리하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우리 선대 임금의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주상은 힘쓸 것이다.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
1899년(광무 3년), 남편 익종의 묘호가 문조(文祖)로 개칭되고 익황제(翼皇帝)로 추증되자, 신정왕후 또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증되었다.[13]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1847년(헌종 13년) 1월 1일, 신정왕후가 40세가 된 해를 맞이하여 창덕궁인정전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은 어머니 신정왕후에게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6] 또한 신정왕후의 사순을 기념하여 헌종은 공인 3000석과 시민의 한 달 동안의 요역등을 특별히 탕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