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1월 1일 기준임.
최재모(崔在模, 1946년7월 10일 ~ 2009년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포지션은 풀백이었다. 선수 시절 정확한 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슛으로 여러 차례 득점을 만들기도 했으며,[1] 과감하고 투지 넘치는 수비력을 선보였다.[2][3] 또한 날렵한 스피드를 활용한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보이며 리베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4][5] 감독으로서는 빠른 템포를 중시하는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6]
그 뒤 1973년 5월 3일 포항제철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23] 그 해 제철소 준공 기념으로 열린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24][25] 그리고 1974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기업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조했으며,[26][27]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당시 해군 축구단과의 최종전에서 김연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28] 또한 1977년 육군 축구단과의 '한일실업정기전' 선발 대회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에 대회 우승 및 대표 선발을 안겼으며,[29]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는 철도청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유건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한 데 이어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박영채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으로 팀의 대회 준우승에 공헌하였다.[30][31] 이러한 활약으로 대회 종료 이후 공로상을 수상했으며,[32] 같은 해 다른 노장 선수들과 함께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33]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최재모는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44]
직후 치러진 CR 플라멩구와의 평가전에도 선발되어 좋은 모습을 보였다.[45][46] 하지만 얼마 뒤 B팀으로 편입되어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에 출전했으며,[47] 후에 다시 A팀으로 합류한 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해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표팀의 사상 첫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단독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48][49] 그 해 이원화 원칙이 다시 폐지되어 국가대표팀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최재모는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으며,[50]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 1970년 아시안 게임에 연달아 참가하며 국가대표팀의 2개 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51][52][53] 이러한 활약으로 1970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54]
그 뒤 1971년 국가대표팀의 중남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었고,[55] 그 해 열린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하였다.[56][57] 또한 직후 펼쳐진 베트남 공화국과의 CISM 주최 '극동지역 친선 축구대회' 경기에 나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으며, 얼마 뒤 있었던 비토리아 FC와의 평가전에도 츨전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58] 이후 뒤이어 치러진 이란과의 친선경기에서 정규풍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2-0 승리에 기여했으며,[59] 같은 해 열린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60] 그리고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패널티킥으로 추가골을 득점하며 대표팀의 6-0 대승에 일조했으나,[61] 수비진을 구축한 다른 선수들과 더불어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62] 그 뒤 킹스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대표팀의 우승에 공헌했으며,[63][64] 국가대표팀 및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1971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재차 선정되었다.[65]
이후 1972년에는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며,[66] 베트남 공화국과의 개막전에서 김정호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67] 그리고 그 해 다시 최재모는 다시 B팀으로 편입되어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에 참가했으며,[68] 버마와의 4강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의 준우승에 일조하였다.[69] 또한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출전할 B팀 명단에 선발되었으나, 일정 변경으로 A팀이 대회에 참여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70][71]
그 뒤 1974년 아시안 게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를 대비해 소집된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72] 자체 평가전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최종 명단에 합류해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73][74] 이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는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박이천의 추가골 2골을 어시스트해 대표팀의 4-0 승리를 견인했으며, 인도네시아와의 결승전에서 박이천의 추가골에 관여하는 등의 활약으로 대표팀의 7-1 대승에 일조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75] 또한 이라크와의 아시안 게임 준결승 라운드 1차전에 출전해 박병철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1-1로 무승부를 이루었으며,[76] 말레이시아와의 준결승 라운드 3차전에서는 이회택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으나 대표팀은 2-3으로 패해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다.[77] 그 뒤 그 해 열린 제3회 한일 정기전에 출전했으며,[78] 얼마 뒤 개최된 킹스컵에도 참가하였다.[79] 또한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페널티킥 동점골을 성공시켜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었으며,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는 등 팀의 2연속 우승에 기여하였다.[80][81] 이러한 활약으로 1974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다시 선정되었다.[82]
이후 1975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 출전할 상비군 후보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83] 그 뒤에는 최재모가 국가대표팀 선발을 고사하며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84]
이후 1994년부터 전라북도전주시 완산구의 전주풍남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했으며,[96] 1997년 열린 '전국 축구교실 초청 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97] 또한 2000년 개최된 '2002 월드컵 개최도시 초청 어린이 축구대회'와 2003년 펼쳐진 '국민생활체육 전국 한마당 축전'에서 우승을 맛보았으며,[98][99]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전라북도 전주시 지역의 축구 붐을 조성하기 위해 온고을 여성 축구단이 창단되자 선수들에게 축구 이론 강습 및 실기 수업을 지도하기도 했다.[100] 그리고 전주시축구협회의 부회장을 지내며 1996년 '전주 시민의 장' 행사에서 체육장을 수상했으며,[101] 2001년 전주시체육회의 이사와 2003년 전라북도체육회의 이사로 선출되었다.[102][103] 이외에 '전라북도 시·군·구 유소년 축구대회'의 주최에 기여했으며,[104] 전라북도 내의 14개 시·군에 '유소년 축구교실'을 개설하며 '전라북도 유소년 축구교실'의 회장을 맡았다.[105]
사망
2007년 8월 위암 판정을 받은 뒤 그 해 12월 위 절제 수술을 받았으나 다른 장기에 암세포가 전이되었으며, 이후 병원에서 지속적인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2009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106] 유해는 전라북도전주시 공원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107] 사후 안구를 온누리안은행에 기증해 환자 2명에게 각막이 이식되었다.[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