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입부 문단에 보면 김대중이 야권을 분열시켰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일단 삭제하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야권의 분열이 양김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김대중만 분열시켰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며, 또 야권의 분열이 당시 정부가 노태우의 당선 및 야권후보 당선 저지를 위해 저지른 정치공작이라는 의혹도 있습니다.--SouthSudan (토론) 2013년 10월 8일 (화) 12:22 (KST)답변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자 틀을 붙이려는데 스크롤 압박이 심하네요. 가독성 현저히 떨어질듯 싶습니다.
예를들어 '김대중 재임 시 문단 같은 경우는 김대중 정부에서 다룰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대중의 정치활동이나 사상을 별도 문서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
김대중의 정치활동보다 김대중의 사상이라는 부분이 문서제목상 상대적으로 나아 보인다는 것이 저의 입장이고요--Backtothe (토론) 2015년 2월 10일 (화) 21:16 (KST)답변
김대중 말고도 역대 대통령 문서는 다 길이가 저정도 됩니다. 어쩔 수가 없는게 문서를 요약해놔도 추종자들이 다시 살을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하고 그럼 거기에 대항해서 부정적인 부분도 살이 붙게 되지요. 그래서 문서 길이는 항상 원상복구 됩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09년인가 김대중 죽었을때 그 추종자들이 김대중 문서에다 죽기 전 병원 입원해서 치료받은 일지를 일 단위로 장황하게 정리해다 올려놨었죠. 그거를 제가 정리해놓기까지 무려 5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정도 시간이 지나야 추종자들이 문서 수정에 태클을 걸지 않더라 이거죠. 그러니까 문서 요약같은건 해봐야 아무 소용 없고 시간낭비에 불과한겁니다. 그냥 이 상태로 두는게 제일 좋아요--220.94.150.230 (토론) 2016년 4월 5일 (화) 18:21 (KST)답변
한국 전쟁 전후 시기 김대중의 행적에 대해선 김대중 본인이 술회한 기록과 1987년 작성된 안기부 문건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김대중의 자서전에 의하면 1949년에 조직된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에 부단장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때 해운 사업도 번창했다고 서술한 바 있는데, 전국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계약하고 있던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 계약이 성사된 덕분이라고 한다.
1950년 6월 15일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김대중은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 수송 운임을 수령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한국 전쟁을 마주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여관에 머물면서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으며 목포까지 걸어서 내려왔지만 대한청년단 소속이 문제가 되어 3일만에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인민위원회 소속 경찰에 연행된 김대중은 강당에서 처형만을 앞두고 있었지만 목포에 주둔하던 인민군이 국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철수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처형은 면했으나 이내 목포시 공산당원에 의해 투옥되고 만다. 같이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을 부추겨 탈옥에 성공한 김대중은 그곳에서 극적으로 장인과 동생 김대의와 재회했으며 집으로 돌아가 천정에 은둔하며 지낸다. 연말이 되자 국군 보조기관이었던 목포해상방위대에 자진 입대,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자신이 경영하던 해운회사 소속 선박을 동원해 인민군 게릴라 소탕에 참전하였다고 한다.[21]
안기부 문건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 6월 27일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보도연맹에 체포되어 미국 육군특무대(CIC)에 의해 아군 후퇴시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목포상고 선배인 김진하의 호명 착오로 구명되었다고 한다.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된 노임 횡령 혐의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9.28 수복시 탈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