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유철도 D51형 증기 기관차
일본국유철도 D51형 증기 기관차(일본어: D51 주로 화물 수송을 위해 이용되어 태평양 전쟁 중에 대량 생산되기도 해서, 일본국철에 소속된 수는 총 1,115량에 달했으며, 디젤 기관차와 전기 기관차 등을 포함한 일본의 단일 기관차의 수로는 최대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갱신되지 않았다.[1] 이외에도, 타이완 총독부 철도용으로 32량, 이부리종관철도(1944년에 국유화되었다)용으로 5량이 제조되어, 전쟁 이후, 소련의 사할린 철도용으로 30량, 타이완 철로 관리국용으로 5량,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 전용으로 표준궤사양을 2량 제조하여 총 1,184량이 제조되었다. 또한, 1987년(쇼와 62년) 4월 국철분할민영화를 할 때, 서일본여객철도(JR서일본)이 1량(200호기)을,다음 1988년(쇼와 63년)엔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에서 1량(498호기)이 복적되어 이 두가지의 D51형이 동태보존 되고있다. JR동일본의 498호기는 복적한 후 오리엔트 급행을 견인하며 부활, JR서일본의 200호기는 2017년에 야마구치선의 야구치호로, 본선 운행에 복귀했다. "데고이치"라는 별명은 일본 증기기관차의 대명사가 됐다.[2][3]. 또한 "데코이치"라는 별명도 있다. 탄생의 배경1929년(쇼와 4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에 겹쳐 일어난 일본의 쇼와 공황에 의해, 1930년대 전반의 일본에서의 철도 수송량은 저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공황이 일어나기 전에 계획해둔 화물용 신형 기관차 제조는 중단됐다. 이후 경기가 다시 좋아지고 수송량 회복세가 뚜렷해지면서 신형 화물용 기관차가 다시 필요해졌다. 그래서 1936년(쇼와 11년)부터 제조되었다. 전기 용접 기술을 응용해 제조되어 당시의 설계 주임인 시마 히데오는 "여러 가지의 설계를 한것들 중에서도, 제일의 회심작"으로서 이 증기기관차를 제시하고 있다[4]. 구조2-8-2의 차륜 배치를 가진 D50형과 기본 설계는 공통적이다.다만 보일러의 압력이 D50형은 13kg/cm²였던것에 비해 D51형은 14kg/cm²로 1kg/cm²승압하고, 실린더의 지름을 축소시켜서 출력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또한, 리벳 접합부를 전기 용접(아크 용접)으로 치환하는 등, 구조와 공법을 재검토하여 축중을 경감하고 전장을 단축하여, 전국적인 배치가 가능해졌다. 최대동축중을 14.3t으로 내린 덕분에, D50형으로는 입선이 어려웠던 병선 입선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단축에 의해 지선에 다수 존재한 18.3m 크기의 전차대에서의 방향전환이 가능해진 덕분에 D51의 운영범위 확대에 기여하기도 했다. 전시형은 보일러의 압력을 15kg/cm 2 까지 승압했으며[5].초기형이나, 표준형도 전후 보일러의 압력을 승압하는 개조가 진행되었다.그러나, 연소실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다른 나라의 증기기관차와 비교하면 열효율이 좋다고 할수는 없다. 전기용접의 전반적인 채용및 동륜심 등 형태적으로는 같은 시기에 설계된 C57형과 공통점이 많다. 제조 시기에 따른 구분D51형은 제조시기와 형태에서 크게 초기형, 표준형, 전시형의 3종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형D51 1 ~ 85 - 91 ~ 100
표준형D51 86 ~ 90 - 101 ~ 954
전시형![]() 전시형의 특징은 상단부가 동그란 상자 모양의 돔을 보일러 위에 장착하는 것이다. D51 1001 ~ 1161
제조양산을 추진하려는 단계에서 국내 정세가 전시 체제로 돌입하고, 화물기인 D51형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 국내 5개 대형 기관차 제조공장과 국유철도 공장 가운데 8개 공장이 생산에 참여해 1936년부터 1945년까지 1,115량이나 되는 많은 차량이 제작되었다.그 중 8량에 대해서는 국유철도의 발주가 아닌, 사철의 전시 매수나 남사할린의 내지화에 수반해 철도성에 편입된 것과 외지용인 것도 전황 악화에 따른 제해권 상실로 인해 발송할 수 없게 되어, 그냥 일본국유철도가 얻은 것이다.또한 955 ~ 1000은 결번으로 되어 있는데, 전시형을 1001부터 번호를 매겨서 구별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국유철도 소유기의 마지막 번호는 1161호이다. 이 외에도, 전쟁 전부터 대만총독부 철도를 위해 제조된 것이 32량(1944년산 5량은 한때 D51 1162-1166으로 도입되어 사용되었다),전후 소비에트 연방 사할린주 철도로 수출된 것이 30량, 유엔군에 납품된 것이 2량, 나아가 1951년에 대만 철로 관리국에 수출된 것이 5량이 존재한다.이러한 것을 합하면 D51형은 총 1,184량이 생산되었다. 철도성(일본국유철도)일본국유철도가 발주한 수는 전부 1,107량이다. 제조된 것은 다음과 같다.
에스토리철도D51 864·865: 에스토리철도(사할린)에서 매수. 1944년에 완벽하지 않은 채로 매수된 사할린의 철도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대체로 표준형에 준하지만, 한랭지 대책으로서 제조시에 밀폐된 캡을 가지고, 탄수차의 전단부에도 바람막이를 세워서 캔버스제 포장을 운전대 사이에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 두 량은 사할린에는 보내지 않고, 홋카이도 내에서 사용되었다. 이부리종관철도D51 950 - 954 : 1944년에 이부리종관철도에서 매수. 내륙사철이 D51 동등기를 만든 유일한 사례이다. 3량을 철도 개업 전인 1940년 5월 설계 인가를 얻어 개업 직후인 1941년 1월에 제작되었다. 엄밀한 완성일은 순서대로, 1941년 1월 9일, 11일, 13일이다. 이후 수송력 강화를 위해 각각 1942년 7월 17일・1943년 5월 7일에 두 량이 더 제조되었다.제조사는 D5101 - D5104가 기샤세이조, D5105가 히타치 제작소로 모두 같은 시기의 표준형에 준한 사양으로 제작되었으며, 형태도 표준형과 같다. 일본질소D51 1161 : 일본질소에서 매수. 하이난섬의 일질흥업석무철도로 사용하기 위해 닛폰차량제조 본점에서 제조되긴 했으나 해군의 패배로 제해권이 상실돼 발송이 안 된 것을 국철이 구입했다. 전시형이며 D51형 전체에서 봐도 유일한 1945년산이며, 철도연구자의 실견으로 제조방법이 더욱 간소화된 것이 확인되고 있다. 중국중국 하이난섬의 철석수송을 위한 일질흥업석무철도는 협궤(1067mm)이며, 1942년 및 1943년(1944년 설도 있다)에 5량의 D51형이 공출되었지만, 종전시에는 2량만 남아있었다. 전후의 동향은 불명확하다. 대만총독부철도·대만철로관리국![]() ![]() 당시 일본 통치하의 대만 총독부 철도를 위해 1939년에서 1944년까지 32량(D51 1 - 32)이 제조된 것으로 형태적으로는 1~27이 표준형에, 28-32가 전시형에 속한다.이 차량들은 일본국유철도 소유였던적이 없다.생산내역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전시형의 D51 28 - 32는 제해권 상실로 발송되지 못하며 일시적인 조치로 일본국유철도가 차입하여 D51 1162 - 1166으로 사용됐다.이 시기 본토에서는 이미 전시형(1000번대)이 만들어졌는데 이 5량은 전전의 표준형과 비슷한 형태(돔은 상단부가 동그란 상자 형태가 아니라 표준형과 같은 모양)로 제조됐다. 이것은 외지용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그러나 모양은 표준형이었지만 돔 이외의 본체, 탄수차 등은 일본에서 제조된 것과 동일한 사양의 전시형과는 성능, 기능면에서 뒤떨어지기 때문에 보일러 압력이 12kg/cm2로 제한되어 있었다.이 5량은 전쟁 후인 1946년 4월에야 대만으로 발송되었다. 대만의 D51형은, 전후 대만 철로 관리국에 계승되어 DT650형(DT651-682)이라고 개칭되었다. 전후인 1951년, 국제연합 원조에 의한 중화민국의 주문으로, 5량의 표준형이 대만에 수출되어 DT683 - 687이 되었다. 제조는 기샤세이조가 3량(DT683 - 685), 신미쓰비시중공이 2량(DT 686·687)을 맡았다.이 5량이 D51으로서 마지막 신형기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사할린) 수출차![]() ![]() 1949년 소비에트 연방으로 수출 물자의 일환으로 국철형 객차등 30량이 사할린에 보내졌다. 이들은 1월에서 4월까지 5개의 회사에서 만들었다. 사할린용으로 수출된 것은 국내용과 구별하기 위해 형식번호와 차량번호 사이에 하이픈이 들어가 있다(예를 들어 국내용은 D51 27인 데 비해 사할린용은 D51-27).또 방한 때문에 운전석은 밀폐 구조로 돼 있는 등 일부 구조가 국내용과는 다르다. 덧붙여 형식이나 번호판에 러시아어로 사용되는 키릴 문자의 "Д"이 아니고, 라틴 문자의 "D"가 사용되고 있다.증기기관차 연구가 우스이 시게노부는 소련의 사할린 점령 후에도 철도 시스템은 일본식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 사할린용 D51의 제조 내역은 다음과 같다.
유엔군・대한민국 철도청1950년 한국전쟁과 함께 철도는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기관차가 파괴되었다. 이 피해 보충을 위해 미 8군은 유엔군 명의로 일본에 증기기관차를 발주하는데, 타사가 남만주철도나 조선총독부철도의 설계도를 남용해 '미카이형'을 제조하는 가운데 미쓰비시중공업만이 D51형을 표준궤·밀폐화하여 납품하였다. 제조 내역은 다음과 같다.
두 량 모두 휴전 후 대한민국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에 넘겨져 미카7형인 미카7-1, 미카7-2로 1960년대까지 사용됐다. 전후 개조기전후, 군수 화물 수송의 사실상 소멸과 식량난에 기인하는 구매등에 의한 여객의 급증에 의해, 전시중과는 다르게 화물과 여객의 수요가 완전하게 역전되었다. 이것에 따라, 전시중에 최우선으로 양산됐던 젊은 화물용 기관차가 대량으로 잉여가 되는 한편, 여객용 기관차는 1942년 이후 제조되지 않고,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급하게 C57형 32량과 C59형 73개가 생산되어 보완되었으며, 이후에도 순차적으로 여객용 기관차를 증차해 왕성한 여객 수요에 대응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 실제로도 C57·59 두 형식의 추가 생산이 계속적으로 실시되고 있었으며, 1948년경에 기관차 회사들은 수많은 주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예금 봉쇄가 단행될 정도로 쪼들리던 정부 재정에 기인하는 예산 동결이 실시되어 국철은 기관차의 신규 제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다.그 때문에, 더욱 부족한 여객용 기관차를 확보할 수 있도록 1948년에 GHQ측 담당 장교 데 글로트의 조언에 따라 D51의 보일러를 활용해, C57형의 크기에서 C60형이나 C62형과 같은 크기로 함으로써 중량증가에 대응하는 주행장치와 조합한 C61형 여객용 기관차가 33량 제조되었다. 신규 제조가 아닌 서류상으론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예산 회계상의 규제들을 피할 수 있었다.이미 차적이 존재하고 있다면, 실제로는 완전한 신차 제조라 하더라도 서류상 '개조'로 함으로써 회계감사상의 지적을 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관료주의적 이 회피책은 전전의 통제경제 초기단계부터 지방사철이 차량를 확보하는 방법이였다.즉 국철 당국은 화물용 기관차의 보일러를 여객용 기관차로 전용하면 된다는 데 글로트의 조언을 다행이라고 표현하기 위해 전쟁 전부터 감독관청으로서 그 수법을 알고 있었던 이 방안을 강구했다.또 이 계획은 장기 방치 상태로 허공에 떠있던 C57형 미완성차의 존재, 나아가 갑작스러운 예산 동결로 곤궁을 당한 제조업체들의 구제라는 의미도 있고, 33량이라는 어중간한 제조 수도 장기 방치된 C57의 현재의 잔수에 따라 정해졌다. 게다가 1960년에는 지역선에서 사용하기 위해 6량의 축중을 개조하여 새로운 형식 D61형을 만들기도 했다. 개별적인 개조기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1956년 11월의 운전 업무 연구회 발표 자료로서 축중가변 기구를 장착한 나라기관구 소속의 D51 65이다. 당시의 나라기관구는 중재가신호장 전후에 가타코너머의 험한곳이있는 간사이 본선을 담당하고 있어, 중량이 많이 나가는 열차의 운용이 곤란했는데, 특히 올라가는 경사로에서 견인시에 중심의 이동으로 공전이 발생하기 쉬운 D51은 개선이 필요했다. D51 65에서의 개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으로, 제4동축후부의 주차(主臺)에 공기 실린더를 부착하여, 제4동축과 종대차를 연결하는 균형점 위치를 이동시켜 축중중심을 바꾸고, 이것에 의해 동축중을 통상의 13.96t에서 15.46t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다[7]. 축중가변 기구는 상향구배나 출발시에 공전 억제에 더해, 방사량의 감소에 의해 궤도보수의 부담경감에도 기여한다는 특징을 가지며, 단순하게 간선규격대응의 강력기를 도입하는 경우와는 달라, 상승 경사 구간이나 역 구내등의 필요한 구간만을 궤도 강화하면 되며, D51의 운용선구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리트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동력 근대화의 방향성이 정해진 후의 개조를 위해서인지 다른 차에는 도입되지 않고 끝났다. 다만, D51 65는 그 후 나라기관구에서 스이타제일기관구로 옮겨져, 스이타조차장의 입환기로서 비교적 장기에 걸쳐 이 사양으로 운용되었다. 덧붙여 이 축중가변의 사상은 D51의 후계차가 된 DD51형에서 형태를 바꾸어 햇빛을 보고 있다. 이 밖에도 D51형은 사용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개조되었고,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에서는 한랭지 대책으로 운전실 특별정비공사라 일컫는 개방형 운전실에서 승무원문이 달린 밀폐형 운전실로의 개조가 실시되고 품질이 나쁜 석탄을 상용하는 상반선으로 운행되고 있던 미토, 평기관구 배치의 D51 112, 121, 123, 248, 313, 381, 389, 411, 503, 551, 645, 647, 672, 695, 821, 914, 931, 946, 1024, 1068 20량에는[8]투탄량이 4~5t을 초과해 기관조사의 2인승무를 피하도록 자동급탄기를 추가 탑재하고 나가노에서는 모래사관 증설이 진행됐다. 그 외에도 중유 병소장치와 ATS용 발전기 설치, 부등 설치, 지붕 후방으로의 연장, 운전실 좌우에 선회창 설치, 게다가 집연 장치(집연 장치의 모양은 담당 공장 마다 세세하게 다르다), 유도 통풍 장치의 장착 등 변화의 베리에이션은 많다.중유 병연 장치용 중유 탱크의 위치는 지역 마다 달라서, 보일러 위의 돔 뒤편에 680리터의 가마보코형 탱크를 장비하는 케이스와, 탄수차(텐더)의 탄고 후방에 1500L 혹은 3000L의 직방체 탱크를 장비한 경우가 있다(대형 3000L 탱크 장비차는 도호쿠 지방에 많았다).또, 비사쓰선 에키코 넘어에 사용된 히토요시구의 D51는, 보일러 위에 있는 탱크의 용량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조수석측 발판 위쪽에 200리터의 보조 탱크를 장비하고 있었다.유도 통풍 장치는 1963년 3월 나가노공장에서 개조된 D51 349를 시작으로 117, 120, 167, 226, 232, 241, 252, 276, 285, 293, 308, 315, 328, 343, 345, 357, 371, 391, 413, 457, 492, 509, 539, 570, 605, 711, 725, 733, 742, 842, 952, 953, 1037, 1042, 1119호기의 총 합계 36량에 설치되었다. 신다의 밀림이 많아 또 불똥 방지로서의 효과도 얻을 수 있는 등 좋은 성적으로, 아키타 기관구나 홋카이도의 각 기관구, 특히 오이와케기관구 소속 차량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 개조가 실시되었다. 운용![]() 전국의 간선·지선에 보급되어 어디서든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시코쿠에서는 도산선 한정으로 사용되었다. 화물용으로도 수수한 존재였지만, 주오 본선이나 하코다테 본선의 급구배 구간(오샤만베 역 - 오타루 역 사이)과 같이 급구배 구간이 많은 노선에서는,급행을 포함한 여객 열차의 견인으로 사용되는 일도 많아, 우에쓰 본선 등과 같은 평평한 노선에서도 여객 열차 견인에 사용된 예가 있다. D51형은 축중이 무겁기 때문에 대부분 도카이도 본선이나 산요 본선, 도호쿠 본선 등의 간선의 화물열차를 중심으로 견인했다. 운전·보수 양면에서는 일부 구배선(후술)을 제외하고 대체로 호평을 받아, 전국적으로 철도 차량의 보수상태가 열악했던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에도, D51형은 9할이 넘는 차량이 여전히 가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의 사용 목적인 중량 화물 열차 견인쪽 에서는, 출력의 증대와 입선 범위 확대를 위한 동축중의 감소, 거기에 차체 전장 단축등의 설계 때문에 부적절한 동축중배분에 의해서, 급구배에서의 견인 시에 생기는 중심 이동 때문에 공전하기 쉬운 경향이 있어, 경사선에서는 설계 기본 모델이였던 D50형이 유리한 국면이 많이 존재했다.또, 차체 전장 단축 때문에 생긴 중심 위치의 불균형을 운전대의 소형화로 때우려는 등 승무원의 작업 환경을 무시한 설계로 되어 있어, 운전대가 넓고 승차감이 뛰어난 D50형을 운용하던 승무원들에게서 혹평을 받았다.그 중에서도 초기형(나메쿠지형)의 평가가 매우 낮고, 사례로서 1·2호기를 비롯한 초기형의 신차배치구였던 쓰루가기관구, 그리고 기소후쿠시마기관구등의 각 기관구는 일단 초기형을 받아들였지만 대부분 예외 없이 2년 전후로 빠르게 다른 구로 전출시켰고 그 후 다른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초기형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표준형을 갑자기 하마마츠 공장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중심 위치를 수정해, 공전 문제를 다소나마 개선한 것의 배경에는, 이러한 급구배선 담당 각 기관차구의 수취 거부와 같은 엄격한 대응이 영향을 준 것이다. 게다가 전술한 각 기관구는 표준형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여서, 가미스와기관구에서는 1941년에 D51형 3량이 배치되었지만, 그 해에 전부 다른 기관차구로 전속시켜 D50형으로 되돌렸다[9]. 이에 비해, 평평한 노선을 담당하는 기관구들은 이나자와 기관구처럼 부정적인 반응은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고속주행시의 탈선대비장치이 채택되고 있던 점을 이용해 비교적 온순히 도입되었다. 1941년부터 생산된 C59형은, 처음 계획할땐 D51형과 같은 보일러를 사용함으로써 양산 효과나 보수의 용이화라고 하는 장점이 생길 예정이었지만, D51형에게 있어서는 중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통보일러를 포기하는 대신 D51형의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보일러를 500mm 연장해 중심을 앞쪽으로 이동시킨 보일러로 설계됐다. 국철형 증기기관차 중에서도 특히 말기까지 수많은 기체와, 높은 인지도에 의해, "대명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기본설계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 광범위한 운용과 인지도는 전시체제에 따른 화물기 수요 대량 증가에서 온 방대한 양산 결과에 불과했다. 세키쇼선・무로란 본선의 화물열차를 견인할때, 유바리 방면의 탄광에서 무로란 항으로 향하는 2,400 t의 석탄 열차를 D50형과 함께 단기로 견인하는 운용을 하던 적이 있었다. 1952년 2월에 오이와케 - 무로란 간에 3,000톤의 견인테스트를 했는데 성적은 양호했지만 단선 구간의 선로 유효길이 관계로 실현되지 못했다.이 열차의 예사롭지 않은 길이는 빈 차일 때 느린 상승곡배인 것과 합하여, 길게 이어진 화차가 공기를 끌어들여 저항이 늘어 속도가 오르지 않았을 정도이다.
전철화나 디젤화의 영향으로 폐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7년경부터로, 증기 기관차 중에서 마지막 시기까지 많은 D51형이 남아 있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세키호쿠 본선, 도호쿠 본선, 오우 본선, 하쿠비 선 등의 급구배 구간에서 중련이나 3중련을 하고 활약하는 모습은 당시의 "SL붐"을 일으켜, 철도 동호인과 사진작가, 그리고 매스컴 관계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또 우에쓰 본선을 비롯한 일본의 원풍경이 남아 있던 선로를 달리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촬영하는 철도 동호인들의 모습도 많았다. 하지만 제조된 수가 많아, 증기기관차 가운데도 잔존 양수가 많고 다른 기관차보다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철도 촬영을 주로 하는 팬들 중에는 다른 형식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가 D51이 오자 "또 D51인가"라며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고, 셔터를 끄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홋카이도의 오이와케기관구에 소속되어 있던 D51로, C57 135이 견인한 국철의 마지막 증기 기관차 견인 여객 열차 운전으로부터 10일 후인 1975년 12월 24일까지 사용되며,이것이 국철의 마지막 증기 기관차 견인 화물 열차 운전 및 국철 마지막 증기 기관차 본선 주행이 되었다. 이러한 국철 증기 기관차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이와케기관구 소속의 D51은, 현지 오이와케나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의 국립과학박물관등, 각지에 보존이 결정되었지만, 1976년 4월 13일 심야에 발생한 오이와케기관구 화재로 갓 배치된 신형 디젤 기관차 8량과 함께 4량(241, 465, 603, 1086호기)이 소실되었다. 현재 아비라정 철도자료관에는 구 오이와케기관구의 기관고 화재로 소실된 정태보존예정기인 241호기 외에 오타루쓰쿠코기관구와 오이와케기관구 등에서 사용되었던 320호기가 정태 보존되어 있다. 320호기는 원래 정태 보존될 기체가 아니였지만, 갑자기 정태 보존기가 됐다. 또 국립과학박물관에는 가야 했을 603호기를 대체한 231호기가 보존됐다. 그렇게 마지막 D51 중 916호기만이 마에바시시 마에바시 어린이 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일본 외에서는 대만에서 DT650라는 이름으로 37량이 있었다. 대만에 있던 차량은 이미 폐차가 됐고 이 중 4량이 정태 보존됐다가 2011년 11월 DT668호기가 동태 보존으로 부활됐다. 앞으로 관광용, 이벤트용으로 운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할린에서 운용된 것은 은퇴 후 6량(1, 2, 23, 25, 26, 27)이 일본으로 돌아가 각지에 보존되고 있으며, 사할린 현지에서도 4호기가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다.
보존증기기관차의 대명사이기도 한 D51형은 폐차, 제적후실에 178량이 전국 각지의 철도박물관, 기타박물관, 공공시설, 학교, 공원 등에서 정태 보존 되었다.그 중 1, 187, 488, 745호의 4량은 준철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이밖에 2량(200, 498호기)이 동태 보존되고 있다. 이 밑에, 보존기의 번호와 소재지를 표시한다.
동태보존과 부활운전JR동일본 498호기동일본 여객철도(JR동일본)가 1988년에 동태 복원한 기관차다.차적은 1972년에 말소되었지만 동태복원 됨에 따라 같은 해 부활하였다. 본선운전에 사용되고 있다. JR서일본 200호기서일본 여객철도(JR서일본)의 교토철도박물관(구 우메코지 증기기관차관)에 보존되어 있는 200호기는 동태 보존되어 차적도 있지만, 검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본선 주행은 할 수 없고, 박물관의 전시선에서만 머무르고 있었지만, 2017년에 본선 운전 가능한 상태로 복원되어 "SL야마구치호"로의 운용을 개시했다. 1979년 차적은 일단 말소(유화 보존)됐지만 1987년에 부활했다 러시아 철도 D51-4사할린주의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다. 주로 일본으로부터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특별 열차를 견인하고 있다. 대만철로관리국 DT668호기2011년 10월 28일 시운전을 실시한 후, 11월 11일 네이완선의 기념운전을 거쳐 정식으로 부활했다[10]. 「데고이치」와 「데코이치」D51은 별명으로 「데고이치」, 「데코이치」또한 사용된다.지금은 「데고이치」를 더 많이 볼 수 있지만 옛 철도 잡지에선 「데코이치」라는 표현기도 많이 존재했다. 덧붙여 이 별명에 대해서, 원래는 「데코이치」이지만 SL붐 이후 "데고이치"의 쪽이 일반적으로 되었다, 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11].
각주
외부 링크참고 문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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