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에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4,000만원, 연봉 1,200만원의 조건으로 입단했다. 데뷔 첫 해인 1990년에 팀의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고 2할대 타율, 13홈런, 62타점, 15도루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고,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또한 신인 포수로서는 처음으로 KBO 골든 글러브상(포수 부문)을 수상했다.[2] 그러나 다음 해인 1991년에는 혹독한 2년차 징크스를 겪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풀타임 포수로 출전하며 2할대 타율, 20홈런, 69타점을 기록해 건재함을 과시했고, 해마다 꾸준히 두 자릿 수 홈런에 정평난 포수 리드를 보여 1990년대 최고의 포수로 군림했는데 1990년 8월 4일 잠실 롯데전에서 도루 성공하여 역대 포수 최초 단일시즌 두자릿수 도루를 기록했으며 총 15개로 마감했으나 이 기록은 2001년 박경완 (21도루)에 의해[3] 갱신됐다.
두 번째 이적 후에도 입지를 못 잡고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2002년 시즌 후 조범현이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조범현이 부임하자마자 그부터 내쳤다. 이는 조범현이 삼성 라이온즈 배터리코치 시절에 진갑용을 더 중용해 그가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져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이 빌미가 됐기 때문이었다.
조범현과의 불화로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된 후 그는 은퇴를 고려했고, 코치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가 때마침 박경완이 FA를 선언해 SK 와이번스로 이적했고, 그 때 주전 포수 공백이 발생한 팀 사정상 그에게 입단 제의를 해 1억원에 계약하며 이적했다. 2003년에 데뷔 첫 3할 타율을 기록을 했고, 2003년 ~ 2004년 팀의 연속 우승 당시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또한, 2003년에 생애 첫 3할 타율을 달성함과 동시에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같은 소속 팀 이숭용, 전준호와 더불어 팀의 고참으로 활약했다.
2008년현대 유니콘스의 해체와 이를 인수한 팀의 창단으로 다른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과 함께 활동했다. 통산 200홈런과 국내 포수 최초 2000경기 출장을 기록했고, 2009년부터 팀의 플레잉코치로 승격됐다.[4]2009년 시즌 후 현역에서 은퇴했고,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정인교가 2군 감독으로 승격되며 그가 배터리코치로 정식 승격됐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