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의 뒤를 이은 선덕여왕은 실제로는 진평왕의 맏딸이며 천명공주는 둘째 딸이나, 드라마에서는 이와 반대로 천명공주가 맏딸, 덕만공주가 둘째 딸이라는 설정으로 바뀌었다(이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을 따름). 더불어 쌍둥이라는 설정이 추가되었으며, 덕만공주가 쌍생으로 궁에서 쫓겨나서 낭도생활을 했다는 것 역시 허구이다.
진평왕의 재위 연도는 서기 579년부터 632년까지로 53년 간이지만, 드라마에서는 30년 정도 밖에 안 됨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즉 선덕여왕의 유모 소화가 칠숙의 손에 죽으며 “우리는 30년 돌고돌아 결국 그 자리네요.”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소화가 칠숙의 손에 죽는 것이 미실의 반란 와중이고, 미실의 반란이 끝난 후 곧 진평왕이 승하하는 것으로 나온다. 소화와 칠숙의 악연이 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의 탄생 때 시작되고, 마야부인이 그 두 공주를 회임한 것이 진평왕 즉위 이전으로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드라마는 진평왕의 재위 기간을 31년 내지 32년으로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실수나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니고, 드라마의 내용 전개상 의도적으로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진평왕의 재위 기간을 53년으로 하면, 진평왕 즉위 당시 10대 말 또는 20대 초였을 소화, 칠숙, 하종 등과, 적어도 30대였을 미실, 노리부, 설원 등은 진평왕의 승하 시점에는 70대에서 80대의 노인이 된다.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으로 설정된다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무리가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즉위 기간을 낮출 수밖에 없다.
또한 역사 기록에 나오는 진평왕은 비교적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임에 반해, 드라마에서는 아주 유약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김유신의 출생연도가 15년쯤 앞당겨져 있다.
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드라마대로 마야부인이 진평왕 즉위 이전에 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을 회임했다면, 두 공주의 생년은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이나 그 다음 해인 580년이 된다. 하지만 천명공주와 선덕여왕과는 달리 김유신의 출생연도는 59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51회에서 드디어 여왕이 되었다. 따라서 선덕여왕과 천명공주가 579년이나 580년에 태어난 것으로 한다면, 김유신보다 15세 내지 16세 많으므로 김유신의 아역인 이현우(1993년생)가 나올 때는 선덕여왕이나 천명공주의 역은 성인 배우가 맡았어야 옳겠지만, 천명공주 역은 신세경(1990년생)이, 선덕여왕 역은 남지현(1995년생)이 맡음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 전개상 김유신이나 두 공주의 나이는 비슷한 것으로 설정되어 내용이 진행된다.
드라마의 내용과 별개로 역사적 사실만으로 보자면, 선덕여왕은 출생 연도를 추측할 방법은 거의 없다. 하지만 천명공주의 경우 그의 아들 김춘추가 602년에 태어났으므로, 출산 당시 천명공주의 나이를 어림잡아 16세로 본다면 586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595년에 태어난 김유신보다 적어도 아홉 살 내외로 나이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 중의 하나가 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이 진평왕 즉위 이후 1년도 안 되어 태어났다는 것임을 감안하면, 역사에 595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김유신의 출생연도를 이 드라마에서는 580년경으로 앞당겨 버린 것이 된다.
백제가 신라 장수 검일의 도움을 받아 대야성을 함락시킨 것은 서기 642년이다. 이때 대야성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었는데, 이 전쟁으로 백제군에 의해 살해된다. 김춘추가 602년생이므로 대야성 함락 당시 40세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당시 귀족들이 조혼하는 일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40세의 나이에 장성한 사위가 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대야성 함락 당시의 김춘추 역을 1993년생인 유승호가 맡았는데, 결국 40세 인물의 역을 16세의 소년이 맡은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배역인 것이다.
태종무열왕의 아버지는 김용춘인데, 드라마에서는 김용춘의 형 김용수(화랑세기에만 등장)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미실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수하 장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픽션이다. 실제 역사서에는 칠숙, 석품이 주도하여 선덕여왕의 즉위 직전에 난을 일으켰다는 점만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에서는 비담의 반란에 미생, 하종, 보종, 주진공, 호재, 필탄 등 미실파 인물들과 귀족들이 대거 가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는 ‘비담과 염종이 난을 주도하였다’라는 언급만 나타난다.
드라마에서는 보량궁주와 김춘추가 혼인을 한 것으로 나오나, 실제로(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는 보라궁주이며 보량궁주는 보라궁주의 동생이다. 또한, 문명왕후는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비담의 난 도중 선덕여왕이 사망하였으나, 드라마에서는 비담의 난이 끝난 뒤 선덕여왕이 승하하는 것으로 나온다. 역사에서 알려진 비담과 선덕여왕에서의 관계는 상대등과 왕 그 이외에는 알려진것이 전혀 없다.
드라마에서 대남보는 미생의 아들로써 등장하지만 실제 대남보는 김용춘의 사람이었으며 미생과는 혈연관계가 없다.
드라마 안에서 진덕여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등장하지 않았기에, 마치 선덕여왕의 뒤를 김춘추가 잇는 것처럼 보이는 부면이 있다. 후에 선덕여왕 스페셜 편에서 유알하게 드라마에서 진덕여왕이 언급이 된 장면이 미방송되었음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에서는 선덕여왕이 죽기 직전 김춘추에게 왕위를 승만공주에게 넘기라는 유지를 남기면서 김춘추가 승만공주의 뒤를 이을 것을 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 역사 속에는 승만공주가 먼저 왕위에 오르고 그 다음이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2012년 12월 24일 서울고법 민사5부(부장 권택수)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1000만원 등 2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으나[4] 2014년 7월 24일 대법원 3부(박보영 대법관)는 "내용이 유사하다고 볼 수 없고 뮤지컬과 드라마가 독립적으로 작성되어 같은 결과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하였다.[5] 이후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이 진행되었고,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드라마 선덕여왕이 저작권 침해를 한 적이 없다는 판결을 확정하여, 5년 간 진행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6].
참고 사항
전작 내조의 여왕과 함께 2009년 12월 열린 제 22회 한국방송작가상 시상식 드라마 부분 후보에 올랐으나 "단수집필자에 의해 쓰여진 순수 창작물 위주"라는 한국방송작가상 규정에서 미달되어 최종 후보에서 탈락했다[7].
2010년 1월 5일부터 1월 31일까지 이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선덕여왕》이 상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