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C]은 1904년을 기점으로 벨기에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축구팀이다.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벨기에 축구 행정 부서인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 (KBVB/URBSFA/KBFV) 가 관리한다.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는 FIFA와 UEFA의 창립 멤버이며,[3][4] 국가대표팀은 두 국제 축구 연맹에 소속되어 있다. 1906년을 기점으로,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붉은 악마[D]로 불려 왔다. 대부분의 홈경기는 브뤼셀의 보두앵 국왕 경기장에서 열린다. 벨기에는 주요 국제 무대에 1920년부터 1938년 사이, 1970년부터 2002년 사이로 2번의 시대로 나뉘어 출전했었고, 그 외의 시기에는 주요 무대 본선행에 고전하였다.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두 차례의 황금기를 보냈는데, 한번은 1980년대에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이어졌고, 두번째 황금기는 2010년대 초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벨기에의 주요 국제무대 성과로는 1920년 하계 올림픽금메달, UEFA 유로 1980 준우승, 그리고 1986년 FIFA 월드컵 4위, 201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사상 최초로 월드컵 3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1954년부터 2018년 사이,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던 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서독, 브라질, 아르헨티나, 그리고 프랑스)[5] 벨기에는 오랜 기간 동안 네덜란드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고, 1905년부터 1964년 사이 (세계 대전 시기를 제외하고) 격년으로 정기 친선전을 벌였고, 그 후로도 간혹 친선전을 벌였다.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는 벨기에 국가대표팀 경기에 35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들에게 공로 메달을 수여한다.[E][6] 역대 최다 경기 출전자는 얀 쾰레만스로 1977년과 1991년 사이 96번의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였다. 베르나르트 부르후프와 파울 판 힘스트는 국가대항전에서 각각 30골씩 공동 최다 득점자이다. 국가대표팀의 서포터 단체 명칭은 1895이다.
벨기에는 유럽 대륙국들 중 가장 먼저 축구를 시작한 나라이며,[7] 1863년 10월 26일, 아일랜드인 학생 사이릴 B . 모로가 헨트 인근의 멜러수녀회 대학교 가죽공을 가지고 다닌 것이 시초가 되었고,[8] 영국인 교사가 벨기에 전국의 학교에 전파하는 것을 도왔다.[9] 이어지는 몇십년간, 축구는 럭비를 넘어 국내 최고 인기 종목이 되었다.[9] 벨기에 축구의 1부 리그는 1895년에 시작하였다.[9] 1900년 10월 11일, 호르헤 디아스 베이르스홋 명예 회장이 안트베르펜에서 벨기에가 유럽 최고 팀들과 여러 차례의 경기를 치를 것임을 밝혔다.[10] 초창디 대회 조직에 애로를 겪은 후, 샬랑주 F. 판던 아베일러가 1901년 4월 28일 벨기에 A팀과 네덜란드 B팀간의 대결로 열렸다.[11] 두 팀간의 전력차는 전자의 팀의 일방적인 8-0 대승으로 증명되었고,[12] 벨기에는 이어지는 3경기 (1-0, 2-1, 6-4) 에서도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13] 그러나, 이 경기는 FIFA에 공식 결과로 남지 않았는데, 이는 벨기에 팀이 몇 명의 잉글랜드 선수들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14]
1901년, 4명의 잉글랜드인들이 조합된 초창기의 벨기에 A팀
1904년 5월 1일, 벨기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위클의 목재 경기장인 스타드 비비에르 도이에서 첫 공식 경기를 치렀다. 양 팀은 현대적인 피라미드 포메이션 (2-3-5)를 사용해 3-3으로 비겨, 양팀 모두 에방스 코페를 소유하지 못하였다.[15] 당시,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위원회에 의해 국내 6-7개 주요 클럽에서 차출되었다.[16]
벨기에는 1905년 초, 네덜란드를 상대로 두번 경기를 치렀는데, 한번은 안트베르펜에서, 한번은 로테르담에서 맞대결을 벌였다. 공교롭게도, 이미 1905년에 네덜란드 언론인은 벨기에 선수 3명이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악마처럼 활약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7] 몇십년간, 벨기에-네덜란드간 컵대회가 열려 "저지대국 더비"로 발전하였다.[18]
1906년, 피에르 발키어르스 레오폴 감독은 팀의 색상과 그 해에 거둔 3연승의 성과 (프랑스전 5-0 대승, 네덜란드전 5-0, 3-2 승리)에 빗대어 선수들에게 붉은 악마 (Les Diables Rouges) 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19]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의 정기 출간물인 스포츠 인생 (La Vie Sportive)의 최종전 경기 리포트에서, 발키어르스는 자신의 팀이 작은 붉은 악마 ("Petits Diables Rouges")처럼 활약했다고 기재하였다.[20] 1906년의 경기에서 5골씩 기록하였으며, 총 23번의 경기에서 26골을 기록한 골잡이 로버르트 더 페인은 벨기에의 첫 주연이었다.
1910년, 윌리엄 맥스웰은 붉은 악마의 첫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의 임기에, 중앙 공격수 알퐁스 시스가 국제무대에 첫 발을 들였다. 역사학자 리처드 헨쇼에 따르면, 시스는 "벨기에의 세계 대전 이전의 역대 최고 선수로 (...) [그는] 대개 비영국인들 중 가장 기술이 뛰어난 공격수로 수식되었다."[21] 축구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중단되었고,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몇 차례 비공식 친선전을 치렀다.[22][23] 비극적이게도,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 3명이 전사하였다.[24] 또 6명은 24세의 나이에 폭격에 의해 사망하였다.[25]
처음 출전한 1920년 대회에서, 붉은 악마는 홈 안방의 이점을 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경기장을 이탈해 논란을 야기한 결승전을 치른 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26] 비록 1920년대 하계 올림픽에서 국가대표팀 기록은 7경기 4승으로 준수했으나, 1930년대에 벌어진 3차례의 FIFA 월드컵에서는 모든 경기에서 패배만 맛보았다. 베르나르 포르호프와 "벨기에 축구의 그랜드 마스터" 레몽 브랜은 둘 다 스트라이커로,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활동한 가장 재능있는 벨기에 선수들이었다.[27][28]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국제 축구 대회는 1940년대에 중단되었다. 조세프 메르망, 레오폴 아눌, 그리고 앙리 코팡와 같은 공격 자원들과, 센터백 루이 카레와 같은 선수들이 1948년과 1954년 사이에 국가대표팀을 떠났다.[21] 벨기에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열린 8개의 주요 대회 중 스위스에서 열린 1954년 FIFA 월드컵, 단 한차례에만 출전하였다. 황금기 직전인 1960년대에 활약한 4차례 벨기에 올해의 선수 수상자 파울 판 힘스트는 벨기에의 UEFA 주빌리 어워드 (1954년과 2003년 사이)의 주인공으로 뽑혔고, IFFHS에 의해 벨기에 세기의 선수로도 선정되었다.[29][30] 그는 1974년까지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약하였다.
국가대표팀의 상황은 1970년대 초, 레몽 후탈스의 지휘 하에 개선되었다. 하얀 악마 (Les Diables Blancs)의 벨기에는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첫 승에 성공하였는데, 이 업적은 각각 1970년과 1972년에 달성하였다. 3위로 마감한 UEFA 유로 1972는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처녀 출전 대회였다.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3차례 벨기에 올해의 선수 상을 받은 빌프리트 판 무르는 1970년에서 1972년까지의 부흥기에 활동하였다. 1970년대 초, 후탈스는 벨기에 1부리그의 최고 선수로 손꼽히는 선수를 '벨기에' 성인 국가대표팀과 훈련시켰는데,[31] 1901년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조합된 온전한 국가대표팀이 아니었다.[32][33] 1973년, 예선 최종전에서 명백한 골이 취소되면서 1974년 FIFA 월드컵 출전권이 날아갔다.[34] 주요 대회 본선행을 위한 이어지는 두 차례의 시도도 물거품으로 끝났다. 1970년대 이래, 오프사이드 트랩이 벨기에 국가대표팀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하면서 팀의 주요 강점으로 자리잡았는데,[35] 이는 1960년대에 피에르 시니발디안데를레흐트 감독이 고안한 수비적 전술이었다.[36]
황금 세대
벨기에의 성공 시대는 UEFA 유로 1980에서 준우승을 거두면서 막이 올랐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까지를 국가대표팀의 첫 황금 세대로 불리고 있다.[37] 100번이 넘는 공식 경기동안 함께 한 기 티 감독의 지도 하에,[22]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체력적으로 우수하고, 잘 조직되어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로 탈바꿈하였다.[38][39]
붉은 악마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UEFA 유로 1980에서 기 티 감독의 지도 하에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벨기에는 1982년과 2002년까지의 모든 FIFA 월드컵 대회 본선에 참가하여 대개 2라운드 이상의 성적을 냈다. 티 감독의 임기 후, 파울 판 힘스트와 로베르 와세주 감독이 국가대표팀의 1라운드 통과를 일구어냈다. FIFA의 개인적 인식을 떠나서, 벨기에는 1986년에 준결승전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1990년과 1994년의 대회에서는 지역 조별 예선에서 본선으로 직행하였으나, 1986년처럼 1998년과 2002년 대회에서는 고전 끝에 홈앤 어웨이 방식의 플레이오프전을 통해 본선에 올라왔다.
UEFA 유로 1980 준우승 이후, 벨기에는 대륙 대회에서 그리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는데, 이후에 참가한 1984년 대회와 2000년 대회에서 모두 조기에 탈락하였다.
같은 시기 신세대 유망주로 구성된 벨기에 U-21 국가대표팀이 2007년에 2008년 하계 올림픽 본선행을 확정지었고, 젊은 붉은 악마들은 베이징에서 열린 2008년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하였다. 훗날 이들 중 17명이 성인 국가대표팀 선수가 되는 젊은 선수단[49] 은 대개 수비 능력과 강력한 중원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바로 성공을 일구어내지는 못하였다. 2009년 9월, 하위팀 아르메니아 (당시 FIFA 랭킹 125위)에게 1-2로 발목을 잡히자,[50] 베르코테랑 대행 감독이 사임하였고, 딕 아드보카트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였다.[51][52] 그러나, 취임 6개월만에, 아드보카트 감독이 러시아 사령탑을 노린다는 추측 속에 사임하였다.[53]조르주 레이컨스가 2010년 5월에 그의 후임감독으로 계약이 만료되는 2012년까지 직위를 맡게 되었다.[54] 레이컨스의 임기에, 붉은 악마는 UEFA 유로 2012 플레이오프행 진출권을 아깝게 놓쳤다. 레이컨스 감독은 2012년 5월에 지휘봉을 내려놓고 클뤼프 브뤼허의 감독이 되었다.[55] 레이컨스의 후임으로, 2009년부터 수석 코치를 맡고 있던 마르크 빌모츠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56]
처음으로 중계된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경기는 1931년 5월 3일자 경기였다. 휘스트 더 마윈크 기자가 라디오를 통해 벨기에와 네덜란드간 경기를 해설했었다. 이 경기는 벨기에 최초로 중계된 스포츠 경기로도 기록되어 있다.[64]
몇십년 후, 텔레비전이 경기 중계의 매체로 더 선호되었다. 59%의 벨기에인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고, 41%가 프랑스어를 사용함에 따라, 국가대표팀 경기는 두 언어로 모두 중계된다. 벨기에가 다수의 대회에 출전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초, 리크 더 사덜레이르가 자신의 감정적이면서 유머감 있는 어조의 경기 해설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해설가가 되었다.[65] 초창기 경기는 지상파 채널인 BRTN과 RTBF에서 각각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로 해설했으나, 1994년을 기점으로 vtm (자매 채널인 카날 2와 함께) 이나 플랑드르의 VIER 등의 케이블 채널들이 중계권을 사들였다.[66]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UEFA 유로 2016 예선전 경기의 중계권은 VRT, RTBF, 그리고 케이블 방송사 BeTV와 텔레네트가 가지고 있다.[67] 벨기에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경기는 2014년 FIFA 월드컵의 벨기에와 미국간 16강전 경기로 1120만명의 벨기에 국민들 중 총 400만명이 시청하였다.[68]
2014년 4월, VRT는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전 당시 국가대표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다루는 모두가 악마 (Iedereen Duivel) 라는 9부작 다큐멘터리를 처음으로 방영하였고,[69] 같은 시기에 텔레네트에서도 선수 개개인에 대해 다룬 붉은 영웅들 (Rode Helden)이라는 8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70]
주요 활동
팬을 위한 활동: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여러 차례의 상호 활동이 되었다: 이 활동은 악마의 도전 (Devil Challenges)으로 불렸다.[71] 전제 조건은 소수의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도움으로 5개의 포괄적인 과제를 팬들이 모두 인정받을 수 있을만큼 달성 ("벨기에를 적색으로 물들여라", "500,000 데시벨 이상", 등등) 하는 것이었다.[72] 2013년 6월, 붉은 악마는 팬과의 첫날에 20,000명의 지지자들을 환영하였다.[73] 2년차 활동은 2014년 FIFA 월드컵이 종료되고 나서 열렸다.[74] 2014년 6월, 벨기에의 조별 리그 경기를 진행하는 와중에, 악마와 춤을 (Dance with the Devils, 2001년 트랜스 앨범의 패러디)[75]이라는 대규모 춤행사가 벨기에의 주요 도시인 안트베르펜, 브뤼셀, 그리고 샤를루아에서 열렸다.[76]
자선 활동: 1926년, 네덜란드와의 비공식 경기는 모금 및 자선 활동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77] 1986년 여름, 벨기에 대표팀이 멕시코 월드컵에서 준결승전에 올랐을 때, 국가대표팀은 미셸 도게 대표의 희망에 따라 빈곤한 집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이 활동은 멕시코의 공업 도시 톨루카의 노숙아를 위한 활동으로, 선수들이 토너먼트를 통해 획득한 보너스의 일부를 기부한 것이었다.[78] 2013년 8월, 국가대표팀은 푸트볼+파운데이션 (Football+Foundation) 자선 단체를 통해 4가지 사회 활동을 추진하였는데, 어깨에 십자표가 붙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 후에 유니폼을 경매하는 활동이었다.[79][80]
반인종주의 캠페인: 2002년 국가대표팀 선수단은 반인종주의 슬로건 앞에서 촬영하였고,[81] 2010년에 벌어진 UEFA 유로 2012 예선전에서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였다. UEFA 추진 활동은 이를 주간 유럽 FARE 활동의 하나로 꼬았다.[82]디미트리 음뷔위 전 붉은 악마 (1987년에 활동한 첫 흑인 벨기에 국가대표)[49][83] 가 이 활동의 대부로 활동하며, 벨기에 대회에 참가하는 다른 외국계 (전)국가대표 선수들도 참가하고 있다.
국가대표팀과 마찬가지로 벨기에 팬들은 적색을 강조하는 벨기에 삼색기로 자신들을 나타낸다. 붉은 악마의 팬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1986년으로 추측되는데, 이 때에 벨기에 대표는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후 '금의 환향'하는 선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는 황홀감에 찬 군중들로 가득찬 가운데, 자국 FIFA 월드컵 4강행의 성과를 낸 선수들이 주요 대회를 우승한 마냥 시청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84] 겨우 2012년이 되어서, 지역 클럽을 지지하는 팬들이 힘을 합쳐 벨기에 국가대표팀 서포터 단체가 조직되었고, 명칭은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가 세워진 연도를 따 1895가 되었다. 1년 후, 1895의 회원 수는 24,000명을 돌파했다.[85]
2014년에 촬영된 벨기에 국가대표팀 팬들
1982년부터 2002년까지 6대회 연속으로 FIFA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후, 국가대표팀은 이어지는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와 FIFA 월드컵을 합쳐 5대회 연속으로 주요 대회 진출에 실패하였다. 부흥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다수의 기자들은 벨기에 축구를 "위독하다"고 묘사하였다.[86][87] 극심한 인기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일부 팬들은 암흑기에도 국가대표팀을 계속 지지하였고, 가장 충직한 팬들 중 한명은 뤼도 롤런베르흐가 있었다. 이 서포터는 1990년 이래 붉은 악마들을 따라 전세계를 돌아다녔고, 1999년 기린컵과 2006년의 2경기를 제외하고 직접 참관하였고,[88] 2009년 아르메니아 전을 참관한 유일한 벨기에 팬이기도 했다.[89]
2008년, 벨기에 U-23 국가대표팀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하였을 때 팬들의 기대감이 올랐고, 이들의 일부는 나중에 성인 국가대표팀 선수로 합류하였다. 비록 2010년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2012의 본선행이 무산되었으나, 이어지는 주요 대회에서의 인기와 믿음은 다시 계속해서 상승하였다.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악마의 도전 (Devil Challenges) 라는 상호적 활동과 팬의 날 (주요 활동 섹션 참고) 통해 팬들과의 유대감이 증가하였다. 예선전 홈경기 시작을 앞두고, 선수들은 국가를 상징하는 색으로 된 10.5미터x11.5미터의 악마가 그려진 티포 배너를 목격하였다.[90] 다수의 선수들이 해외의 상위 리그에서 활동하며, (예를 들어 2013년 7월을 기준으로 12명의 붉은 악마들이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되었다.)[91] 마르크 빌모츠 감독 지휘 하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FIFA 월드컵에서의 선전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인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2개의 벨기에 랜드마크가 2014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의 상징색으로 장식되었다: 오줌싸개 소년 조각상은 FIFA 월드컵에 사용될 유니폼의 어린이용 유니폼을 입었고,[92]아토미움의 윗쪽 구는 흑색, 황색, 그리고 적색으로 덮였다.[93]
대중 문화
벨기에 가수 스트로마이는 2014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벨기에 국가대표팀에 "당신의 축제를 위해" (Ta fête) 라는 곡을 헌정했다.
팬클럽들과 SNS 웹페이지간 열정을 공유하는 것 외에도 국가대표팀의 응원은 팬 도구, 붉은 악마들에 헌정한 기타 물품의 구매로도 나타났다. 구매 물품으로는 저서, (참고 문헌 섹션과 관련 저서 섹션 참고) 영화, 만화책, 그리고 노래가 있었다. 상업적 목적 외에도, 이 물품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회에 대한 기대나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영화: 2005년, 오프사이드 (Buitenspel) 이 개봉하였는데, 12세의 벨기에인 소년이 국가대표팀 일원이 되는 것을 꿈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94] 이 벨기에 영화는 2004년 네덜란드 영화인 오라녜의 일원으로 (In Oranje)의 리메이크 영화이다.[95]
만화책: 만화는 벨기에가 오랜 전통을 지닌 분야로 땡땡의 모험이나 스머프와 같은 몇가지 연재물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첫 국가대표팀 연재물이 나왔는데, 제목은 붉은 악마 (de Rode Duivels / les Diables Rouges) 로 최소 3권이 나왔다.[96] 이 전에도, 2권의 만화책이 1982년과 1998년 FIFA 월드컵에 대해 출판된 적이 있었다.[97][98]
노래: 1970년을 기점으로 몇명의 벨기에 가수들이 간단하고, 열정적인 노래를 FIFA 월드컵이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작곡하였다.[99] 이 곡들은 항상 공식적인 지위를 누리거나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로부터 승인되지만은 않았다.[100]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공식 응원곡은 당신의 축제를 위해 (Ta fête) 로, 벨기에의 싱어송라이터 스트로마이가 작곡하였다.[101]
마스코트와 로고
국가대표팀은 3가지 의인화된 마스코트를 지니고 있다: 디아볼리스 (Diabolix) 라는 이름을 가진 사자, 적색의 슈퍼 악마, 그리고 팬에 의해 만들어진 현대판 악마.[102] 2012년, 붉은 악마는 적색 삼지창을 새 문양으로 도입하였다.[103]
전통적으로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홈 유니폼은 벨기에 삼색기 색상을 사용한 것으로, 특히 상하의와 양말이 모두 적색이었을 정도로 대개 적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특징이 별칭이 붉은 악마가 된 점을 뒷받침한다. 1901년에 열린 비공식 경기에서, 대표팀은 양팔에 삼색기 색상의 환이 둘러진 밝은 색상의 유니폼을 입었었다.[18] 결국 1902년에 열린 벨기에의 비공식 경기에서 선수들이 " 만나는 상대마다 그들을 잘 나타낼 국가 상징색으로 된 줄무늬가 있는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하였다.[12]첫 공식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은 평범한 적색 유니폼을 입었고, 짧은 기간 동안 적색과 황색, 흑색의 가로 삼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는 실험 끝에, 본래의 적색 유니폼으로 회귀하였다.
원정 유니폼은 대체로 백색이나 흑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유니폼에 삼색기를 응용한 무늬를 넣곤 했다. 1970년, 후탈스 감독은 전통적인 적색 유니폼을 사용하는 대신에 상, 하의, 양말이 모두 흰색인 원정 유니폼을 사용하기를 원하였고, 저녁 경기에도 선수들이 잘 보이게 하고 싶었다.[104] 이 유니폼 조합은 잔여 1970년대동안 사용되었고,[105] 한동안 하얀 악마(De Witte Duivels / Les Diables Blancs) 가 되기도 했다. 2014년에 들어, 써드킷이 출시되었는데, 상, 하의, 양말이 모두 황색이었다.[106]
문양
벨기에의 구 (舊) 사자 문양
초창기에 유니폼의 심장부쪽에 벨기에의 국장으로부터 유래한 흑색 방패 안의 금색 사자가 위치했다. 1981년을 기점으로, 협회 문장이 구 사자 문장을 대체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30년 개장 당시 명칭은 100주년 경기장 (프랑스어: Stade du Centenaire / 네덜란드어: Jubelstadion) 이었고, 비공식저지대국 더비[113]를 보기 위해 이 거대한 경기장에 70,000명이 넘게 입장하기도 했다.[114] 1946년에 헤이젤 경기장 (프랑스어: Stade du Heysel / 네덜란드어: Heizelstadion)으로 개칭되었으나, 1985년엔 훌리건들이 건물을 파손한 것으로 인해 헤이젤 참사로 이어졌다. 이 참사는 과감한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게 됐고 10년간의 리모델링 공사 후, 현대화된 경기장은 1995년에 보두앵 전 국왕의 이름을 따 개칭되었다.
훈련 구장
국가대표팀 홈 경기를 앞두고, 마지막 훈련 세션만 홈구장에서 치러진다: 2007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훈련은 튀비즈의 국립 축구 센터에서 진행된다.[115]
1930년 벨기에와 네덜란드간 경기 (2-2)의 하이라이트 (3분 31초)1904년, 벨기에 (왼쪽) 와 프랑스 양팀의 공식 데뷔전 사진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강력한 라이벌 관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축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양팀의 공유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설명되며, 축구의 경우에도 양국 모두 오랜 기간 열정을 공유하기도 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간의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특히 붉은 악마와 오라녜간의 축구 경기는 저지대국 더비로도 불렸다. 양국이 밀접한 관계를 지님에 따라, 두 팀간의 맞대결은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친선전에서 조차 매우 팽팽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다.
1901년에 벌어진 첫 비공식 경기에서 잉글랜드인 4명이 조화된 벨기에 팀이 8-0 대승을 거두었다.[12] 이어지는 3차례의 비공식 맞대결에서도 벨기에가 승리하였다.[116] 두 팀간의 첫 공식 맞대결은 1905년에 있었는데, 이때에도 벨기에는 잉글랜드인 수문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연장전 후에 네덜란드가 4-1 승리를 거두었다. 1년 후, 벨기에는 첫 공식 더비전 승리를 5-0으로 장식하였다. 양국은 1905년부터 1964년까지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격년으로 친선전을 치렀다. 현재까지 두 팀은 125번의 공식 경기를 치렀다.[F][5] 저지대의 양국은 주요 대회의 대진을 통해 18번 만났을 뿐만 아니라 최소 35번의 친선 컵대회 맞대결을 벌였다.[22]양팀간의 전적에서 현재 네덜란드가 앞서고 있다: 오라녜가 55승을 거두었고, 붉은 악마가 41승을 거두었다.
벨기에와 프랑스간의 경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04년, 양국간의 첫 대결은 양국 모두에게 첫 공식 경기였고, 동시에 유럽 대륙 전체에서 두 독립 국가간의 첫 공식 경기였다.[120] 역사적으로, 양팀은 수 차례 맞붙었다: 1970년까지 양팀은 거의 매년마다 만났었다. 벨기에는 프랑스가 국제대회에서 가장 자주 만난 상대이기도 하며, 양국간 총 73번의 공식 경기를 벌였다.[G] 전체적인 양팀 전적에서는 붉은 악마가 30승으로 앞서 있는 반면, 파란 군단 (Les Bleus) 은 24번의 맞대결에서 승리했었다.
스태프진
20명이 넘는 스태프진들이 선수들과 함께하며, 다음은 주요 스태프진들의 목록이다:[121]
벨기에는 처음 5차례의 FIFA 월드컵 본선에 들어 1라운드에서 생존하지 못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30년의 초대 FIFA 월드컵에서 득점 없이 2패를 당한 후, 1934년과 1938년 대회에서는 득점을 올리긴 했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1954년 대회에서는 잉글랜드와 무승부 (연장전 후 4-4로 비김)를 거두어 첫 승점을 수확하였고, 1970년 대회에서는 엘살바도르 (3-0)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1982년부터 2002년까지, 벨기에는 FIFA 월드컵 본선에 6대회 연속으로 예선을 통과해 진출하였고, 2라운드에 5번 올라갔다. 1982년 FIFA 월드컵 개막전에서, 벨기에는 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1-0으로 이겨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벨기에는 2차 조별리그에서 폴란드의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고, 소비에트 연방에 0-1로 패해 탈락하였다. 4년 후의 1986년 FIFA 월드컵 대회에서는 역대 최고 FIFA 월드컵 성적인 4위를 거두었다. 토너먼트전에서 소비에트 연방에 비해 전력이 밀리는 벨기에는 연장전 끝에 소련에 4-3 승리를 거두었다.[122] 이후 8강전에서는 스페인을 상대로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나중에 우승을 차지하는 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0-2로 패하였다.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벨기에는 잉글랜드와 16강에서 만났다. 벨기에는 경기를 지배하였고, 엔조 시포가 골대를 두번이나 강타하였으나,[39] 연장전 막판에 데이비드 플랫의 "사각" 발리슛을 헌납해 패하였다.[123]1994년 대회에서도 벨기에는 전 대회 우승팀 독일에게 2-3으로 패해 또다시 16강에서 탈락하였다. 1998년 대회의 조별 리그에서 3무를 거둔 벨기에는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도 처음 두 경기를 비기며 부진하게 시작하였으나, 러시아와의 결정적인 최종전에서 3-2 승리르 거두었다. 16강에서, 벨기에는 나중에 우승을 차지하는 브라질에게 패하였다. 마르크 빌모츠의 헤딩 선제골이 호케 주니오르의 "유령 파울"에 취소된 후,[124] 브라질에게 0-2 패배를 당하였다.
2014년 대회에서, 벨기에는 3전전승을 거둔 팀들 중에 골득실차가 가장 적었다. 그 후로, 벨기에는 미국과 흥미로운 16강 경기를 벌였고,[125] 이 과정에서 팀 하워드 미국 수문장이 15번의 선방을 기록하였다.[126][H]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붉은 악마는 미국팀 (Team USA)를 상대로 연장전 끝에 2-1로 이겼다. 팽팽한 8강전에서, 벨기에는 아르헨티나에게 0-1로 패해 탈락하였다.
2018년 월드컵에서는 벨기에는 조별예선에서 튀니지, 파나마, 잉글랜드를 꺾고 조 1위로 16강에 오르고 16강에서 일본에 3대2의 대역전승을, 8강에서 브라질에 2대1승리, 4강전에서는 프랑스에 0대1로 패했으나 32년만에 월드컵 4강이라는 성적으로 신기록을 세웠으며 3-4위전에서 잉글랜드를 2대0으로 완파하며 월드컵 3위라는 성과를 얻고 귀국했다.
벨기에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성적은 FIFA 월드컵 성적처럼 꾸준하지 않다. 벨기에는 2차례 대회를 개최했는데, 두번째 대회는 공동 개최였고, UEFA 유로 1972에서는 서독에게 1-2로 패한 후 헝가리에 2-1로 이겨 3위를 차지 (이 대회에서 벨기에는 개최국으로써 준결승전의 4팀 중 1팀으로 참가하였다.) 하였으며, 2000년 대회에서는 1라운드에 탈락하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
벨기에의 최고 성적은 논란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서 열린 1980년 대회에서 깜짝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조 1위를 차지한 벨기에는 결승전에 진출해 서독을 상대하였다. 서독의 호르스트 흐루베슈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후, 레네 판더레이컨이 페널티킥으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보였다. 정규 시간 종료 2분 전, 흐루베슈의 2번째 골로 독수리 군단 (Die Adler) 이 벨기에의 첫 유럽 대회 우승을 저지하였다.
UEFA 유로 1984에서 덴마크와 조별 리그 최종전을 벌여 2-0으로 앞서나갈 때만하도 다음 라운드 진출이 확실해 보였으나, 붉은 악마는 덴마크 다이너마이트 (Danish Dynamite)에게 2-3 역전패를 당하였다. 16년 후, 벨기에는 UEFA 유로 2000을 공동 개최하면서 유럽 최고의 대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스웨덴과의 1차전에서 2-1로 이긴 후,[127] 이어지는 이탈리아와 터키와의 경기에서 연달아 0-2로 패해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후 16년간 벨기에는 유로대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은 후 유로 2016대회에서 16년만에 8강 토너먼트에 오르는데 성공했으나 웨일즈에 1-3의 패배를 당하고 8강에서 짐을 싸야 했다. 그 이후에도 유로 2020대회에서도 8강에서 이탈리아에 1-2의 패배를 당해 유로대회 2회연속 8강에서 패하는 쓴잔을 마셨다.
1908년과 1936년 사이의 하계 올림픽 6개 대회의 축구 종목은 남자 성인 국가대표팀이 참가했었다.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1920년대 하계 올림픽의 3대회 모두 출전하였고, 이중 홈 안방에서 열린 1920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벨기에는 처음 두 경기에서 승리 (스페인에게 3-1, 네덜란드에게 3-0)를 거두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1920년 하계 올림픽 축구#금메달 결정전에서는 2-0으로 앞서나갔다. 공격수 로베르 코페가 얘깃거리가 된 페널티킥을 극초반에 성공시켜 벨기에가 앞서나가게 했고, 앙리 라노에의 추가골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레프트 백 카렐 스테이너가 퇴장당하면서, 불만에 찬 방문팀들은 40분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 후, 원정팀은 올림픽 위원회에 항의의 사유를 냈다.[26] 이 항소로 체코슬로바키아 팀은 퇴장 조치를 받아 실격 처리되었다: 벨기에는 2-0 승리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21]붉은 악마의 올림픽 우승 주역은 코페였는데, 그는 스페인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은 1910년을 기점으로 23명의 정식 감독과 2명의 대행 감독이 지휘하였다.[22][132] 1910년 이전과 1919년에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 회장인 에두아르 드 라벨레유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할 선수를 소집하였다. 초창기에 외국인 감독의 지휘를 받은 벨기에는 1930년이 되어서야 헥토르 후트니크가 벨기에 출신의 감독으로는 최초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정식으로 잡게 되었다.
2015년 6월 12일을 기준으로, 마르크 빌모츠는 통계학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정식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한 경기당 평균 2.17점의 승점을 획득하였다. 벨기에 국가대표팀에게 가장 성공적인 시대를 가져다 준 감독은 기 티로 UEFA 유로 1980 준우승행을 견인하였고, 6년 후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FIFA 월드컵의 4위를 차지하게 도왔다. 이 공로로 월드 사커지에서는 티 감독에게 1986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33]
↑KBVB, URBSFA, KBFV는 각각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로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를 뜻하는 두문자어이다: KBVB는 네덜란드어 명칭인 Koninklijke Belgische Voetbalbond의 약자이며, URBSFA는 프랑스어 명칭인 Union Royale Belge des Sociétés de Football Association의 약자이며, KBFV는 독일어 명칭인 Königlicher Belgischer Fußballverband의 약자이다. 이중 축구 협회 로고로는 독일어 약자인 KBFV는 생략하고, KBVB-URBSFA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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